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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삽살개·진돗개·동경이·고려개, DNA 95% 같은 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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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토종개 혈통 밝혀낸 ‘개박사’들

하지홍 교수가 삽살개육종연구소에서 강아지를 살피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하지홍 교수가 삽살개육종연구소에서 강아지를 살피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개박사. 사람들은 하지홍(64) 경북대 교수와 김종주(49) 영남대 교수를 이렇게 부른다. 이들은 동물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척 사랑했던 두 남자다. 이들은 세상에서 사라질 뻔한 한국의 토종개를 되살리기도 했고, 토종개가 보다 확실한 핏줄을 유지할 수 있게도 했다. 최근엔 진돗개와 삽살개, 동경이, 고려개 등 한국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토종개들이 서로 ‘형제 사이’란 사실도 밝혀냈다.

연구 중인 하 교수와 김종주 교수. [프리랜서 공정식]

연구 중인 하 교수와 김종주 교수. [프리랜서 공정식]

두 개박사는 2005년 만났다. 이들이 만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삽살개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유전공학 전공 하지홍 경북대 교수
“개와 놀다 학교 지각하는 일 잦아”
92년 삽살개보존회 설립해 연구

축산학 전공 김종주 영남대 교수
“개와 함께 개집에서 잠자기도”
DNA 분석 ‘개 품종 확인 키트’개발

2005년 만나 토종개 공동 연구
토종개와 외국 개의 유전자 비교
‘삽살개 토종 논란’ 과학적으로 정리

하 교수는 대구에서 가장 큰 목장에서 태어났다. 목장이 있던 곳은 지금 아파트가 늘어선 주택가가 됐지만, 1960년대만 해도 벌판에 가까웠다. 목장 주인은 그의 부친인 고(故) 하성진 경북대 수의학과 교수였다. “목장 지키는 개가 20마리 정도 있었어요. 아침부터 개와 정신없이 놀다 지각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 교수는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가 제자들과 함께 토종개 연구를 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세월이 흘러 하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유전공학을 전공하고 85년 경북대 교수가 됐다. 모두 미생물을 이용해 유전학 연구를 할 때 그는 개 유전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인생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목장에서 함께 놀던 삽살개가 떠올랐습니다. 훗날 제가 한국삽살개보존회를 설립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죠.”

김 교수의 개 사랑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셰퍼드를 데리고 왔는데 매일 함께 놀았습니다. 하루는 제가 없어져 부모님이 온 동네를 찾아다니다 개집에서 자고 있는 저를 발견한 적도 있어요.” 고교 졸업 후 김 교수가 진학한 곳은 서울대 축산학과였다. 그만큼 동물을 좋아했다. 하지만 축산학과에선 돈 안 되는 동물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소나 닭 같은 이른바 ‘경제동물’ 위주로 수업이 짜였다. 졸업 후엔 미국 텍사스A&M대학에서 축산학을 공부했다. 그때만 해도 개가 아닌 돼지를 이용해 유전학 연구를 했다.

한국삽살개재단이 최근 복원한 고려개(왼쪽)와 삽살개.

한국삽살개재단이 최근 복원한 고려개(왼쪽)와 삽살개.

2005년 영남대에서 일하게 된 김 교수는 하 교수와 비로소 만난다. 그땐 하 교수가 이미 삽살개 보존 선구자로 알려져 있던 때였다. 하 교수는 92년 한국삽살개보존회를 만들어 삽살개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의 연구에 감명받은 김 교수는 e메일을 보냈다. 함께 토종개 연구를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둘이 함께 농림축산식품부 연구개발과제에 지원했습니다. ‘분자 육종 기법을 적용한 삽살개 품종 정립 및 세계적 산업화’란 어려운 제목이었죠. 쉽게 말해 삽살개를 연구해 전 세계에 우수성을 알리겠단 뜻입니다.”

하 교수에게도 둘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그는 94년 불거진 ‘삽살개 토종 논쟁’으로 상처를 입은 터였다. 이 논쟁은 서울의 한 수의사가 ‘삽살개가 진짜 토종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됐다. 하 교수는 “당시엔 과학적으로 토종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상대가 마구잡이 주장을 해도 판판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2000년 들어 생물 유전 정보를 해독하는 지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에 불이 붙으면서 논란을 가릴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인간에 이어 개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됐다. 김 교수의 e메일이 날아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최신 유전학 연구에 밝은 김 교수와 만난 하 교수는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개 품종 확인 키트. [프리랜서 공정식]

개 품종 확인 키트. [프리랜서 공정식]

둘은 동고동락하며 연구에 매달렸다.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 동경이(천연기념물 제540호), 삽살개(천연기념물 제368호), 고려개 사이의 유전자 분석이 이뤄졌다. 토종개와 외국 개 간의 유전자 비교 연구도 진행됐다. 외국 개 9품종 60마리, 토종개 4품종 154마리가 동원됐다. 여기엔 김 교수가 개발한 ‘개 품종 확인 키트(kit)’가 큰 역할을 했다. 메모리칩처럼 생긴 이 키트는 개 유전자를 분석해 품종을 가려내는 장비다. 각각의 유전자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분석할 수 있다. 유전자 데이터가 방대해지면 피 한 방울로 개가 무슨 종인지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분석 결과 토종개끼린 95% 이상 유전 구조가 같은 모습을 띠었다. 외국 개들과는 80% 이하였다. 유전 구조가 다르다는 것은 이들이 그만큼 오랫동안 다른 환경에서 살며 다르게 진화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하 교수는 “삽살개가 한국 토종개와 유전 구조가 흡사하다는 것은 외래종이 아니라는 뜻”이라며 “이로써 ‘삽살개 토종 논쟁’이 과학적으로 정리됐다”고 말했다.

개박사들은 앞으로도 개 연구에 파고들 계획이다. 멸종된 토종개를 복원하거나 개 유전자 연구를 통해 인간 유전병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등 도전할 연구들이 무궁무진하다. 하 교수는 “지금까진 유전학 연구가 미생물이나 실험쥐를 통해 이뤄졌지만 개 유전학 연구가 본격화되면 새로운 역사를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털 짧은 삽살개’ 토종 고려개, 40여 마리 복원 성공

진돗개와 삽살개는 사람들에게 이름부터 친숙한 토종개다. 하지만 ‘고려개’는 낯설다. ‘고려개’란 이름도 최근에야 붙여졌다. 고려개를 흔히 볼 수 있던 시절엔 그냥 이름 없는 개였다. 고려개는 조선시대 그림에도 자주 등장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위해 만들어진 관청인 ‘도화서(圖畵署)’에 일했던 김두량(1696~1763)도 고려개(사진)를 그려 영조에게 바쳤다. 영조는 친히 그림에다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 책임이거늘 어찌하여 낮에 또한 이와 같이 짖고 있느냐’라는 글을 남겼다.

임금의 글까지 받았던 개가 오늘날에 아무도 모르는 개가 된 셈이다. 고려개는 쉽게 말해 ‘털 짧은 삽살개’다. 진돗개보다는 털이 길지만 눈을 덮진 않는다. 귀는 누웠다. 성격은 점잖다. 그 많던 고려개가 갑자기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는 뭘까. 하지홍 경북대 교수는 ①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 토종개를 대량 도살해 없애려 했고 ② 일본에서 건너온 도사견이 고려개와 잡종을 이뤘으며 ③ 토종개 보존 노력이 없어 고려개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1945년 해방 때쯤 고려개는 국내에서 거의 멸종됐다. 고려개는 최근 한국삽살개재단의 노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삽살개 집단 중에서 3% 이하의 낮은 비율로 털 짧은 개체가 태어나는 점에 주목한 하 교수의 연구가 발판이 됐다. 털 짧은 삽살개 집단을 분리해 번식시켜 복원에 성공했다. 지금은 40여 마리의 고려개가 현실 속에서 뛰놀고 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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