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학원가·수험생 부모들 쥐락펴락 … 대치동 ‘돼지엄마’ 아! 옛날이여

중앙일보

입력 2017.02.18 01:00

업데이트 2017.02.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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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변화하는 사교육 시장

A씨(50)는 서울 대치동에서 고등학생 대상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5년 전만 해도 전업주부였던 그가 ‘사교육 1번지’에 학원을 낼 수 있었던 건 ‘돼지엄마’로서의 경력 덕이다. A씨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던 2004년 대치동으로 이사 왔다. 아이를 위해 각종 입시·학원 정보를 수집했고, 중학교 이후 아들의 성적이 두각을 나타내자 엄마 사이에서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아들과 수준이 비슷한 애들을 모아 엄마들을 대표해 학원 측에 원하는 내용·방식의 수업 개설을 요구한 적도 많다.

입시제도·학원 정보·스타 강사 꿰뚫어
우수 학생 유치, 학원 명성에 큰 영향

“네트워킹 강해 학원장 위에 군림
상담실장 하거나 직접 학원도 차려”

대입 수시 늘고 학생부 비중 확대
대학·고교·학원서 설명회도 열어
돼지엄마 역할 갈수록 줄어들어

아들이 명문대에 입학한 뒤 A씨는 그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학원 상담실장으로 근무했다. A씨는 “돼지엄마 출신 실장, 원장은 엄마들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교육 정보도 밝아 학원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교육열 높은 엄마들이 카페에서 교육 정보를 교환하는 모습. 강남 대치동에서 5~6년 전까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최근엔 많이 줄었다. [중앙포토]

교육열 높은 엄마들이 카페에서 교육 정보를 교환하는 모습. 강남 대치동에서 5~6년 전까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최근엔 많이 줄었다. [중앙포토]

교육열 높기로 유명한 대치동 학부모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돼지엄마다.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다른 엄마들을 이끈다는 뜻에서 붙은 은어로 2000년대 후반 등장했다. 입시제도, 학원가의 최신 정보, 스타 강사들의 명단을 꿰고 있고, 학부모 커뮤니티와 학원들을 ‘쥐락펴락’하는 엄마를 말한다. 이미애 샤론코칭앤멘토링 대표는 “돼지엄마가 되려면 우수한 자녀와 교육 정보는 물론 리더십·인맥·수완을 두루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사교육에 열성적인 엄마들은 있었다. 1988년 과외금지법 해제와 함께 대치동에 사교육 바람이 불었고, 대입 실적이 좋은 ‘강남 8학군’ 고교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받는 자녀를 둔 엄마들은 알음알음으로 우수 강사를 데려다 과외를 시켰다. 강남 학부모 온라인 커뮤니티 ‘디스쿨’의 김현정 대표는 “현덕학원·신양재학원 등 대치동에 문을 연 지 20년 가까이 된 학원들이 원조 돼지엄마가 만든 곳들”이라며 “자녀를 법대·의대에 합격시킨 후 강사를 모아 종합학원을 차렸다”고 설명했다.

돼지엄마의 위세는 2000년대 들어 한층 강해졌다. 대입 성공의 3대 비결로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란 유행어가 돌던 그 시기엔 대치동은 특목고·국제중의 확대로 늘어난 입시 수요를 흡수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돼지엄마의 역할도 자연히 커졌다. 김 대표는 “대치동 학원이 1000여 곳에 이를 정도로 늘었고, 학부모들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알짜배기 정보’에 목말라했다”고 전했다. 돼지엄마들은 이런 갈증을 해소했다. 풍부한 입시·사교육 정보를 바탕으로 학원·강사·강의를 연결한 팀 수업을 자녀의 학업 성적이 비슷한 엄마들에게 제안했다. 당시 자녀를 대치동 학원가에 보냈던 김모(47·개포동)씨는 “돼지엄마로부터 팀 수업 제안을 받는 것 자체가 자녀가 상위권 그룹이라는 증거였다. 돼지엄마의 전화 한 통에 엄마들의 희비가 갈렸다”고 말했다.

돼지엄마는 학원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르는 엄마들이 많으니 매출과 직결됐다. 또 명문대에 합격 가능한 우수 학생들을 움직이기 때문에 돼지엄마를 유치해야 학원도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학원은 돼지엄마의 입맛에 맞는 수업·강사를 마련해야 했다. 오기연 대오교육컨설팅 대표는 “돼지엄마가 ‘우리 애들을 그 학원에서 뺀다’고 말하면 학부모 사이에 금방 말이 퍼졌다. ‘엄마 네트워크’가 강한 돼지엄마는 학원장 위에 군림했다”고 설명했다.

2000년 후반부터 자녀 입시를 마친 돼지엄마가 학원 상담실장으로 스카우트되거나 직접 학원을 차리는 사례가 늘었다. 대치동 S학원 평가이사는 “대개 입시가 끝난 후 2~3년 학원 상담실장으로 경영 노하우를 익힌 후 따로 학원을 차린다”고 전했다. 이런 돼지엄마는 대개 자녀가 과학고·외고를 거쳐 서울대 또는 각 대학 의대에 입학한 경우다.

입시 지형의 변화로 돼지엄마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대입이 정시(수능) 위주에서 수시 중심으로 바뀌고,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수험생 자녀를 둔 박모(46·서울 도곡동)씨는 “학종에선 자녀의 희망학과에 따라 맞춤형 입시 전략을 짜야 한다. 수능 고득점을 목표로 팀수업을 주도했던 스타일의 돼지엄마 역할은 줄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 정보를 얻는 통로가 늘어난 것도 배경이다. 2010년 이후 대학·고교·학원이 공개 설명회를 개최하면서 발품을 팔면 누구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박모(44·서울 역삼동)씨는 “돼지엄마의 도움 없이 아들을 합격시켰다. 스스로 컨설턴트가 되기로 맘 먹고 입시설명회를 다니면서 정보를 모았더니 불가능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반면 돼지엄마의 역할이 과거와 달리 ‘대중화’됐다고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오 대표는 “입시환경의 변화로 학원의 소규모 맞춤형 수업이 일반화되면서 정보와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돼지엄마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영유아 사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젊은 돼지엄마가 등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치동의 한 교육 컨설턴트는 “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영어유치원·영재교육원 정보를 제공하는 ‘신(新)돼지엄마’들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밝혔다.

[S BOX] 대치동 학원가, 특목고·자사고·국제중 덕에 호황 누려
‘사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에 학원가가 형성된 건 1990년대 초반이다. 70년대에 고교 평준화가 시행되고, 강남 일대가 개발되면서 경기고·휘문고·숙명여고 등 명문고가 대치동 인근에 자리 잡은 게 계기였다.

대치동 학원가가 확대된 건 90년대 이후 과학고·외국어고의 확대, 2002년 이후 민족사관고·포항제철고·광양제철고 등 자립형사립고(현 자율형사립고)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이들 학교는 우수 학생을 뽑기 위해 난도 높은 지필고사를 출제했다. 그 덕분에 대치동 학원들은 특목고·자사고 지원자를 위한 고입 강의로 호황을 누렸다. 2000년대 중반 청심국제중·대원국제중·영훈국제중이 문을 열자 대치동 학원들은 초등학생 대상 입시교육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당시 대입 환경도 대치동의 성장을 도왔다. 2000년대 중반까지 수시보다 정시의 비중이 높은 편이어서 수능만 잘 보면 ‘SKY(서울·고려·연세대)’에 합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2008년 특목고의 지필고사가 폐지되자 특목고 입시 학원들이 타격받았다. 수능 중심의 학원들도 2010년대 들어 ‘쉬운 수능’이 유지되고, 대입 수시전형이 늘어나면서 쇠퇴했다. 최근 대학들이 내신, 교내 활동을 중시하는 학생부종합전형을 늘리면서 대치동 학원가는 다시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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