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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도라지 위스키, 티켓 다방 마담 … 콩처럼 흔한 일상을 위한 찬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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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콩 이야기
김도연 지음, 문학동네
292쪽, 1만2000원

제목은 소박한 느낌이지만 안에 실린 작품들의 면면은 결코 순진하거나 고루하지 않은 소설집이다. 강원도 평창이라는 출신 지역 만큼이나 푸근한 인상의 작가 김도연(51)씨는 스스로 작가적인 천품(天稟)에 대한 확신이 없었나 보다. ‘등단매체 세탁’이 필요했거나. 1991년 강원일보, 96년 경인일보, 2000년 중앙일보, 꼬박 10년간 자그마치 세 매체로 신인 등단했다. 그 세월이 온통 공력으로 쌓인 듯 이번 소설집은 편편이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된다.

소설집 제목처럼 콩이 지천으로 흔한 콩의 생산과 관련된 지역이 소설집에 실린 9편 대부분의 공간 배경이지만 김씨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테크닉’은 ‘도시 작가’ 뺨칠 정도다. 현실과 꿈·환상의 경계는 무너지기 일쑤고, 다큐인지 소설인지 헷갈릴 정도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게 되는 작품도 있다. ‘도라지 위스키’ 같은 어딘가 쓸쓸하고 낭만적인 기표를 떠올리게 되는 단편 ‘별다방의 몰락’은 제목에 충실하게도, 이제는 지난 시대의 풍경이 되어버린 티켓 다방의 오늘을 실감나게 전하는데 불쑥 소설가를 인물로 등장시켜 티켓다방 마담을 취재하는 형식으로 작품을 꾸몄다. 작품 준비 과정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 흥미를 돋우는 메타(초월)적인 장치다. 소설집 한 권을 구성하는 여러 편의 단편을 쓰는 몇 년간 한 작가가 한 생각에만 매달릴리 없으니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 같은 걸 거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만, 소설집에 담긴 여러 메시지 중 인상적인 하나를 소개하라면 가령 이런 거다.

“빨리 잊어버리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불행일까요?”(89쪽)

산간의 리조트 개발로 해체 위기에 놓인 농가 상황을 그린 단편 ‘파호(破戶)’의 한 대목인데, 부모가 남긴 농가와 전답 처리라는 숙제를 짊어지고 눈밭 꿩사냥에 나선 일가족 남정네 6명의 대화 중 나온 말이다. 들꿩들은 불과 몇 분 전 무리 중 몇 마리가 희생된 자리를 금세 다시 찾는다. 이들에게는 빨리 잊는 ‘새 대가리’의 운명이 불행이겠으나 사람은? 쉽지 않고, 어쩌면 정답 없는 질문을 소설은 던진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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