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13

중앙일보

입력 2017.02.18 00:02

업데이트 2017.02.18 00:02

그대, 내 차가운 발에 입 맞추고
겨울을 녹여줘

- 3막

가녀린 품에 당신 호흡을 담아
긴긴밤 숨 쉴 수 있게 해줘

그대, 내 몸 언 이슬 벗기고
최초의 땀방울 입혀줘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대 몸짓으로
내게 알려줘

살아있다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

수요일 이른 저녁 5시쯤 철재 계단을 내려오는, 아이보리 코트 깃을 목까지 치켜세운 시오가 보인다. 시오는 2층에 산다. 평평한 아스팔트를 걷는 듯 계단에서 가뿐하게 통통거린다. 철재 계단에 닿는 구두 굽 소리가 막 내려앉은 어둠에 흩어지지만, 시오는 잔디밭을 산보를 하듯 마냥 들떠있다. 시오는 요리조리 골목을 헤집을 작정인가보다.

시오가 사는, 지천명을 넘긴 듯한 골목의 건물 사이엔 검은색 볼펜을 자로 대고 그은 듯한 전기선이 머리 위로 어지럽다. 빽빽한 건물 사이를 빠져나오면 숨 가쁜 사차선 도로가 나오고, 클랙슨 소리가 어지러운 도로의 샛길을 따라가면 작고 오래된 다리가 나온다. 빈집이라는 이유로 오래되고 좁은 집을 할인점 땡처리 공산품처럼 계약했지만,  철새가 가끔 날아드는 하천과 손수레를 천천히 끌고 가는 환한 노인의 얼굴을 노을이 붉던 다리 위에서 발견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또 하나 시오에겐 특별한 의미가 생겼다. 미지의 매표소 남자, 이 다리를 따라가면 시오는 매표소 남자를 만날 수 있다.

시오가 극장으로 향할 땐 간혹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를, 세 번 반복해서 플레이한다. 1분 정도 피아노 솔로는 범구에 대한 알듯 모를 듯한 애틋함과 서정적인 감정, 어느새 혼돈의 플레이에서 베이스와 드럼이 경쾌하게 어우러진다. 이때 시오의 옷자락 끝이 살짝 들뜬다. 빌 에반스의 연주는 지극히 감성적이지만 감정적이지 않았다. 60년대 빌의 피아노 선율이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도시 속 시오를 어루만졌다.

오션 시네마 왼쪽 건물은 테트리스 블록 같은 붉은색 벽돌로 마감했다. 1층엔 리스, 사고 대차, 정비라 고딕체로 굵게 표기된 정체가 모호한 바이크 전문점과 2층은 유령의 집처럼 빛이 통하지 않게 큰 창문에 무광택의 검은 시트지를 빼곡히 펴 발랐다. 붉은색 글씨로 '백화점 납품 용 모피 공장'이라 쓰여 있다. 왠지 음산하다. 지하엔 댄스 스포츠라는 경박한 노란색 간판이 세련된 화장이라도 되는 듯, 말 그대로 스모그 메이크업을 했다.

개발이 시작된 이 사차선 도로엔 이제 제법 높은 빌딩이 들어섰다. 하지만 오션 시네마와 주변의 추레한 건물은 종말을 맞이한 표정으로 밤낮으로 짙은 포효를 내질렀다.

어느새 시오는 극장 앞에 도착했고, 옷매무새를 살피더니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와... 심하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극장에서 일생을 보낸 스크린 맞은편 붉은 의자, 극장의 시간 동안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몸을 말없이 열어주었다. 손길에 익숙해진 낡은 의자는 그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찌든 얼룩과 움푹 팬 시트로 자신을 설명했다. 시오는 의자의 얼룩이 더러웠지만, 이제는 의자의 말을 조금 알아듣는 듯하다. 조금 편하게, 남녀의 속살이 나오자 부끄러워하다 웃는다. 어둠 속 드문드문 앉아있는 남자들의 모습에 마음 졸였던 시오였지만, 이제는 그들의 뒤통수가 제법 친근하다. 처음엔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스크린 속 벌거벗은 남녀의 맨살도, 단골 식당의 오래된 벽처럼 편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시오는 스크린 안의 거짓 오르가슴을 알아본다. 여자라면 저 신음이 거짓인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사람들은 어리어리한 부하직원과 자고, 배불뚝이 마트 아저씨와도 자고, 첫눈에 반한 애인의 친구와도 자고,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온 처제와도 자고, 퇴폐적인 이웃집 할머니와도 잔다. 잘도 자는구나.

시오는 새로운 프로가 상영될 때마다 극장을 찾았지만, 자신 외의 여자를 이곳에서 마주친 적이 없어서 극장 안 사람들을 경계했다. 아니, 어쩌면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이 시오처럼 서로를 경계하는지도 모른다. 스크린 속 뜨거운 정사를 극장을 찾는 모든 관객이 공유하지만, 그들은 섬처럼 각기 떨어져 앉은 채 자신의 호흡과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겐 각자의 사적인 공간, 방이 필요로 했다.

영사실 앞쪽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양이다. 스크린 불빛 속에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피어올랐다가 초라한 스크린의 자막 사이로 흩어졌다. 영사기 램프에서 쏟아지는 빛, 사람들의 몸과 움직임에서 떨어진 먼지들이 작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입김처럼 따스해 보인다. 오늘 상영하는 영화는 ‘fat bottomed girl‘. ‘엉덩이가 큰 여자’ 라고 자막이 검은색 바탕에 쓰여 있다. 어째 조짐이 이상하다. 퀸의 노래와 제목이 같았다. 시작부분의 미장센은 제법 세련됐지만, 시오는 여느 때의 국산 에로영화의 어색한 연기와 화면 쪽에 더 친근함을 느꼈다.

유리가 태양에 강렬하게 반사되는 높은 빌딩 옥탑방, 짙고 검은 머리카락이 땅에 끌리는 거대한 엉덩이의 여자가 헐벗은 채 감금되어있다. 맙소사. 피트니스클럽에서 쉽게 발견할 듯한 터질 듯한 근육질 신부가 올블랙 수단에 로만 칼라를 빼입고 빌딩 앞을 지나다 감금된 여자를 발견한다. 검은 털이 매끈한 굶주린 사냥개는 그녀의 방 앞에서 굵은 침을 뚝뚝 흘리며 크르렁 크르렁! 번쩍이는 쇠 목줄을 팽팽하게 당긴다. 삼엄한 보초, 옥상 앞은 살벌하다. 근육질 신부는 성호경을 어깨와 머리와 가슴에 새기며 기도한다.

매일 기도해도 거대한 엉덩이를 구할 수 없다. 여자는 신부를 본 이후 구원을 갈망하며 괴로워하다 긴 머리를 늘어트린 채 자살을 결심하고 옥상 난간에서 흐느낀다. 어깨 뽕을 잔뜩 넣은 듯한 신부는 빌딩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발견, 그녀에게 곧 구해주겠다고 소리 지르자, 여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옥탑으로 와달라고 말한다. 기다림이 사랑으로 승화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음침한 옥탑방 안에 어울리지 않는 농염한 체위로 서로의 육체를 탐미한다. 그리고 여자는 아이를 잉태한다. 그들의 짙어가는 사랑, 조금씩 불러가는 배를 바라보며 둘은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불안해진다. 빌딩의 주인이자 여자를 감금한 검버섯이 가득 낀 노인은 임신을 알고 분노한다.

복수심에 통구이처럼 바짝 탄 노인이 신부의 손가락을 자른다. 그리고 굶주린 셰퍼드에게 잘린 손가락을 던진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장면에서, 시오는 문득 매표구 사이로 언뜻 보았던 남자의 손이 떠올랐다. 짧고 뭉뚝한 남자의 가운뎃손가락. 남자 주인공의 상황과 매표소 남자의 손가락이 같다는 생각을 하니 시오가 처음으로 그 남자를 목격했던 눈이 오는 날, 깃발처럼 휘날리던 남자의 검은색 남방도 신부의 검은색 수단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갑자기 시오의 서늘해진 마음 끝자락이 남자의 얇은 옷깃처럼 심하게 바람에 흔들렸다.

늘 잘린 손가락을 내밀던 창구에서 매표소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맑고 사려 깊은 눈으로 시오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제 여기 오지 마세요."

시오가 언짢은 표정으로 사라져버리려나 생각했던 매표소 속의 범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시오가 도저히 감정이 예측 불가한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당황했다.

범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시오가 마치 입이 없는 큰 거인이라도 된 듯 느껴졌다. 1초, 2초, 시간이 뿔 달린 악동처럼 둘 사이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자 범구 머릿속의 문장들은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고 이상한 변명만 산만하게 뛰어다녔다.

"여기는 보통 극장이랑 좀 다르잖아요. 어둡고... 오시는 분들도 좀... "

이 말을 하고 핑곗거리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범구도 느꼈다.

"음... 아니면 사람이 적은 시간에 오실래요? 더 일찍이나... 더 늦게. 괜찮으시다면..."

'이건 도대체 누가 하는 소리지.'

범구는 자신이 뱉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서너 번 눈을 깜박인다.

"아무튼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많아서 위험해요. 차라리 수요일 다섯 시 전후로 오세요. 그땐 사람 거의 없으니까."
증거가 묘연한 범죄현장을 수색하다 스스로의 함정에 빠진 형사처럼 범구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극장 상황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관객의 숫자는 늘 예상과 들어맞지 않았다. 범구는 평소 쉽게 긴장하지 않았지만, 초라한 감정으로 수음하던 범구는 연화와 뒤바뀐 여자의 표정과 침묵에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시오의 표정이 수음하던 때 마주친 얼굴과 겹치자 당황했다. 잠든 여자의 치마 속을 음흉하게 들추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 듯,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무 말이나 둘러대야 했다. ‘괜히 말을 꺼냈나. 그 시간에 관객이 많으면 어떻게 하지.'

"아무튼...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제야 시오는 뭔가 말하려다 참고,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은 돌아갈게요."

오지 말라는 범구의 첫마디 말을 들었을 때 시오는 그간 극장에서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나 곰곰이 생각했다. 침묵하는 내내 머릿속에 필름을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돌리고 있었다. "여기는 보통 극장이랑 좀 다르잖아요. 어둡고... 오시는 분들도 좀..." 범구가 이 말을 이어갈 때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고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온풍기에 얼굴을 처박고 바람을 쐬는 것 같았다.

"곤란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길요."

시오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갈게요. 수요일 다섯 시라고 하셨죠?"

그 수요일은 시오가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오늘이다. 다섯 시 상영작 ‘엉덩이가 큰 여자’. 데이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오는 가장 맵시가 좋은 코트를 꺼내 입고 극장으로 왔다.

시오는 스크린을 보고 있었지만 범구의 손가락의 사연이 궁금했다. 영화는 이제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었다.

여자와 신부는 빌딩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신부는 사제복을 벗고 여자와 오솔길 옆에 가정을 꾸린다. 배 속의 아이는 어느덧 둘의 곁에서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아이가 잠든 시간, 남자는 잘린 손가락으로 아기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눈을 마주 보다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 천천히 서로의 옷을 벗긴다. 스크린 속은 거대한 여자의 엉덩이로 가득 차고 남자는 '여전히 크고 아름다워.' 여자의 귀에 속삭이며 온몸에 입을 맞춘다. 여자는 아이가 깰까 신음을 삼킨다.

 스크린 속 남녀의 몸짓은 점점 더 거칠어진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자의 가슴은 실크 블라우스를 따라 실루엣이 드러난다. 평화롭던 여자의 표정은 어느새 농염한 고양이 눈을 하고 남자의 중심으로 파고든다. '당신의 냄새는 언제나 날 자극해.' 여자가 말한다. 화면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여자는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물고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듯했다.

거짓말, 시오는 생각했다. 성기를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도 냄새를 맡고 싶은 적도 없다. 남자가 시오의 머리를 붙들고 성기를 목 끝까지 처박으면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가 느껴졌고, 짐승 같은 지린내는 역했다. 침과 범벅이 되면 구토가 밀려왔다. 그렇지만 한 번도 남자에게 불쾌감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왜인지, 남자와의 관계에서 시오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는 정말로 좋아서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문 걸까.

시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기껏해야 심심풀이로 먹던 짭조름한 비스킷이나 한여름 냉장고 문을 열고 집어 든, 단단하게 얼어붙은 과일 맛 하드 정도. 그리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했던 것과...

그리고 또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폭력적인 남자의 힘, 힘없이 벌어진 입 사이로 목젖을 사정없이 부딪치던 딱딱한 성기, 사정할 때 더 급해지는 남자의 손놀림, 비린 정액 냄새, 끈끈하고 미지근한 이물질이 입속에 쏟아지던 불쾌감. 저건 다 거짓말이야.


나는, 나는 돼지다.

내게 주어진 것은 쓰다 버려진 것들.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려진 것들.

내가 있을 자리는 버려진 공간.

남자에 의해 이용되는 육체.

극장 안은 영화가 끝나고 다음 영화가 시작하는 텀에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시오는 길게 한숨을 쉬었고 어둠과 더러워진 의자가 편했다.

다행이라고, 시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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