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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는 다 놓친 인도 ‘현찰과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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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인도 정부가 ‘검은돈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단행한 화폐개혁이 오는 15일 100일을 맞는다.

모디의 화폐개혁 100일
전자결제, 징세액 늘었지만
차명 계좌 등 지하경제 여전
주의회 선거 결과가 첫 심판대

미국 대선일이었던 지난해 11월 8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특별담화에서 “당일 자정부터 기존 500루피와 1000루피 지폐 유통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신권 500루피와 2000루피를 발행할 테니 기한 내에 구권을 바꾸라”고 했다. 거래의 98%가 현금으로 이뤄지는 인도에서 시중 현금의 86%를 차지하는 500·1000루피 지폐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가진 돈을 신권으로 바꾸지 못하면 전 재산이 종이 조각이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대혼란이 이어졌다. 신권 교환을 위해 은행 지점과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장시간 줄을 서다 사망하는 노인들이 속출했다. 급격한 현금 부족 사태로 소비가 위축되고 생산 활동도 차질을 빚었다. 그 후 100일, 화폐개혁의 현재 점수는 ‘절반의 성공’이다.

모디 정부가 내건 목적은 ▶지하경제 척결 ▶세수 증대 ▶결제 수단의 디지털화 등이다. 이 중 ‘현금 없는 인도(Cashless India)’를 기치로 한 디지털 결제 시장은 뚜렷이 성장하고 있다. 전자결제업체인 페이티엠(Paytm)과 원모비 등은 화폐개혁 이후 신규 사용자 수가 2~3배 증가했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지난 1월 한 달 사이 인도에서 판매 즉시 중앙컴퓨터로 매상 금액이 정산되는 점포판매시스템(POS) 거래는 전년 동기 대비 100% 이상 급증했다. 세수도 늘고 있다. 인도 재무장관은 개혁 이후 47개 도시에서 직·간접세 등이 268% 더 걷혔다고 밝혔다. 개혁 직후 급락했던 달러당 루피화 가치도 이전 수준을 되찾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지하경제가 없어질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당초 정부는 기존 고액권을 폐기하면서 막대한 검은돈을 무더기로 무용지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인도중앙은행(RBI)에 따르면 약 90%의 구권이 신권으로 교환됐다. 검은돈이 대부분 세탁된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검은돈 보유자들이 차명으로 분산해 구권을 예치한 뒤 신권을 찾는 방법으로 검은돈을 신권으로 바꿨다”고 전했다.

인도에선 화폐개혁을 우화모음집인 『판차탄트라(Panchatantra)』에 비유하기도 한다. 연못(경제) 속 악어(부패)를 잡기 위해 물(현금)을 다 퍼냈더니 악어는 뭍으로 나가 쉬면서 새로운 우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애꿎은 연못 속 물고기만 다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라구람 라잔 전 RBI 총재는 “영리한 자들은 어떻게든 법망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며 “정책의 초점을 조세행정 개선 등 검은돈을 만들어내려는 유인 자체를 없애는 데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화폐개혁의 첫 심판대는 다음달 8일까지 치러지는 인도 주의회 선거가 될 전망이다. 연방국가인 인도는 올해 29개 주 가운데 인구가 2억 명으로 가장 많은 우타르프라데시주를 비롯한 5곳이 주의회 선거를 치르고 다음달 11일 개표한다.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모디 총리가 속한 인도국민당(BJP)이 현직 주총리가 소속된 사마지와디당(SP), 국민회의(INC) 연합과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인도 싱크탱크인 옵서버리서치 재단의 아쇼크 말리크 연구원은 “인구가 집중된 우타르프라데시 선거 결과가 화폐개혁 이후 정부의 국정 주도권을 판가름 지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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