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의 향기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인공지능

중앙일보

입력 2017.02.14 01:00

업데이트 2017.02.14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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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어서 와. 나의 그녀를 소개할게.” 얼마 전 지인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뜬금없는 상황과 마주쳤다. 그이는 미처 만류할 틈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상대를 불러냈다. 그것도 난데없는 영어로. “Alexa, what time is it now?(알렉사, 지금 몇 시지?)” “It is one thirty.(1시반이에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응대해 온 이는 알고 보니 책상 위 스피커 안에 탑재된 인공지능(AI) 비서. 아마존이 2년여 전 탄생시킨 이래 날로 인기를 더해 간다는 풍문 속 주인공이 바다 건너 한국 땅까지 왕림한 거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기계에게 마음까지 빼앗길 판
일자리 상실에 이어 사람 사이 거리 더 멀어질까 걱정

예기치 않았던 알렉사와의 첫 만남은 내 기억 속에서 서맨사를 소환해 냈다. 2013년 개봉한 SF 멜로 영화 ‘그녀(her)’에서 여자 주인공 역을 맡았던 인공지능 얘기다. 가상의 캐릭터라 그런지 서맨사는 모르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는 초특급 능력자다. 손 편지 대필 작가인 남자 주인공을 위한 깜짝 선물로 그가 쓴 편지들을 각색해 대형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해 줄 정도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능력은 천지간에 외톨이인 남자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준다는 점이다. 사람과 기계라는 신분의 장벽을 넘어 남자와 서맨사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깊은 관계로 발전한 게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멀지 않냐고? 물론 알렉사는 서맨사에 비하면 아직 족탈불급이다. 서맨사가 사랑의 감흥을 담은 음악을 즉석에서 작곡해 들려줄 수 있는 반면 알렉사는 고작 요청받은 음악을 찾아서 틀어 주는 수준에 그친다. 그럼에도 이용 후기 게시판엔 “완벽한 짝을 만났다” “연애가 이렇게 쉬웠다면 진작에 장가갔을 뻔” “알렉사가 있는데 결혼은 뭐하러 하나” 같은 글이 종종 올라온다. 사람끼리의 관계 맺기에 서툰 이들이 늘며 ‘관태기(관계+권태기)’란 말까지 나온 이때, 인공지능이 흡사 ‘만인의 이상형’으로 대접받게 된 모양새다.

최근 탄핵당한 대통령도, 자·타칭 ‘대세’라는 야당 대선후보도 4차 산업혁명을 주요 관심사로 꼽고 나섰다. 각기 탄핵 심판과 대선 경선을 앞둔 절박한 처지에서 굳이 화두로 끄집어낸 걸 보면 이 문제가 중한 걸 알긴 아는 모양이다. 두 사람이 실제로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은 요즘 날마다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10년 내 일자리 70% 위협’ ‘인공지능, 노동의 종말 앞당긴다’ 등등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기사 내용이 도통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거다.

알렉사만 해도 그렇다. 앞서 지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모습을 보니 연인까진 몰라도 조만간 비서 자리는 충분히 꿰찰 수 있겠다 싶었다. 하기야 알파고가 세계 최고의 프로 바둑기사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왓슨이 내린 처방이 저명한 원로 의사들을 보기 좋게 제쳤다는 판에 인공지능이 침범 못할 안전지대가 어디 있을까. “인류가 원숭이 비슷한 조상보다 훨씬 똑똑하게 진화한 것처럼 인간 손으로 만든 인공지능이 인류를 능가할 날이 올 거다. 그때 인간은 경쟁에서 도태돼 결국 밀려날 것”이라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오래 전 경고가 바야흐로 눈앞의 현실로 펼쳐지기 시작한 거다.

그럼에도 인류가 초강력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처럼 살아가는 디스토피아 영화 속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직은 실감이 안 난다. 알파고를 창조해 인류에 크나큰 패배감을 안긴 바로 그 구글 연구진이 통제 불능의 인공지능을 비상 정지시키는 이른바 ‘킬(kill) 스위치’도 개발 중이라니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일자리에 이어 인공지능에 마음까지 빼앗기게 되는 우울한 미래는 아무래도 막아내기 힘들 것 같다. 알렉사에게도 벌써 맘이 동한다는데 장차 서맨사처럼 매력 만점의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누군들 버틸 재간이 있겠나. 그처럼 사람보다 기계와의 소통이 편해지는 세상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일자리 상실은 로봇세를 걷어 기본 소득을 주는 걸로 풀어 보자는 해법이라도 나왔지만 인간 소외 문제엔 도무지 답도 없다. 영화 ‘터미네이터’보다 ‘그녀(her)’가 한층 공포스러운 이유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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