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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3.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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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흩어졌던 생활을 하나씩 정돈하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 살아내는 것이 부끄러움을 이기는 길이다. 불경을 읽는 것으로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았다. 불경이 답을 가르쳐주진 않아도 질문을 다독여주기는 했다.
그녀는 할 일이 없는 날은 바깥으로 나갔다.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자 했다. 다른 세상을 보고자 했다. 그래야 내면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땀을 보고 눈물을 보고 웃음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던 힘은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막대했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서림의 금대(琴臺)에 들러 거문고를 타곤 했다. 노인정의 노인들이 그녀의 연주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시조창도 함께 하고 탁주를 나눠 마실 때도 있었다. 노인들은 줄 것이 없을 때 바로 옆의 혜천(惠泉)에서 샘물 한 바가지를 떠다 주기도 했다. 거문고 소리가 전쟁으로 다친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라도 어루만져 주었으면 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위로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녀에게도 필요했다. 언젠가는 삶이 제자리로 돌아오거나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간다고 믿었다. 하늘과 땅과 들판과 바다도 달리 보였다.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월명암 낙조대에도 자주 올랐다. 첩첩 이어지는 변산 너머 조각배처럼 떠 있는 섬들 사이로 번지는 낙조를 보고 있노라면, 다 하지 못한 사랑이 멀리서 그녀를 불렀다.
유희경의 소식은 다시 멀어졌다. 한 해가 더 지나고 이번에는 편지 없이 시 한 편만 부안의 아전을 통해 전해왔다. 나쁜 소식, 허튼 약속일망정 편지를 받는 편이 나았다. 매창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밤마다 그의 시가 혼령처럼 그녀를 찾아왔다.

임과 한번 헤어진 뒤로 구름이 막혀 있어
나그네 마음 어지러워 잠 못 이루네
기러기도 오지 않아 소식마저 끊어지니
벽오동 앞에 찬 빗소리 차마 들을 수 없어라

매창은 윤금이를 데리고 뒷산에 올라갔다. 솔잎주 담글 솔잎을 따기 위해서였다. 산이 깊어 나무와 식물이 다양하게 자랐다. 논과 밭에서만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나무가 울창해서 버섯도 제법 많이 딸 수 있었다. 봄에는 산나물,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꽃과 열매, 겨울에는 나무뿌리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철 따라 먹을 것을 대주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세상 만물에는 인연이 깃들어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덕을 베풀고 해를 끼치며 세상살이를 꾸려나갔다. 아무리 바빠도 매창이 자기 손으로 꼭 하는 일이 술 담그기였다. 몸도 즐겁고 마음도 기꺼운 일이다. 광에는 잎과 열매와 뿌리와 과일로 봄여름가을겨울 담근 술항아리가 줄을 맞춰 서 있다. 재회의 날이 온다면 저 술을 다 마실 동안 머물라고 말하리라. 아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병이라도 함께 나눌 복록이 주어지길 바랐다.
장덕이는 자석이라도 매달아놓은 것처럼 윤금이를 따라왔다. 소 팔러 가는 데 개 따라가듯이 아무 때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종종거리며 윤금이 뒤를 따라다녔다. 산나물을 캐다가 삶아서 말리는 일도 둘이 꼭 붙어서 같이 했다. 봄에 장 담글 메주콩을 삶을 때 주걱을 젓는 사람도 장덕이었다. 그윽한 솔향에 매창은 고개를 들고 숲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 중 하나다. 나무와 나무들이 뿜어내는 지독하게 강렬한 열망의 냄새. 식물들은 꼼짝없이 한 곳에 붙박여 살아야 하는 생명이니 냄새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그 냄새의 켜켜에 사랑과, 분노와, 한탄과, 배고픔이 속속 배어 있다. 비 온 뒤엔 더욱 진해진 냄새로 제각각의 갈망을 올올이 표현했다.
한식경 남짓 지나자 자루가 절반쯤 찼다. 허리가 시큰거릴 즈음 도시락을 풀어 점심을 먹었다. 짠지와 멸치젓, 푸성귀와 된장이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다. 장덕이는 수저를 들고 윤금이 가까이로 바투 다가앉았다.

“윤금이가 올해 몇 살이지?”

“저보다 한 살 어린 스물셋이옵니다.”

“아씨가 나한테 물으셨는데 왜 네가 나서서 대신 대답을 하냐?”

장덕이가 끼어들어 먼저 대답했다가 윤금이한테 어깨를 한 대 얻어맞았다.

“제일로 고울 나이로구나. 꽃보다 더 고울 나이야.”

“저처럼 못난 얼굴더러 곱다 하시면 그건 욕이옵니다. 곱기야 아씨가 참말 곱지요.”

“네 나이 때는 자기가 얼마나 고운 줄 모르는 거다. 저기 저 꽃처럼. 나비가 찾아와 향기를 맡고 꽃가루를 묻혀 나르기 시작하면 자기 때가 무르익었음을 눈치채지.”

“맞습니다요, 아씨. 너, 아씨 말씀 잘 새겨들어라. 내가 왜 너를 따라다니는 줄 이제 알겠냐? 꽃이 아무리 예뻐도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냐?”

“너 말 한번 잘 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나비도 좋고 벌도 좋고 다 좋은데 왜 하필 너처럼 시커멓고 못생긴 나비가 먼저 찾아오냐고?”

그들의 농담은 끝 간 데 없었다. 자기들이 얼마나 좋은 때를 지나고 있는지 몰라서 더 아름답겠지. 제 열정에 사로잡혀 짝 없는 매창의 허한 마음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오늘은 일찍 내려가자. 내일은 술을 빚어야 한다면서.”

“예. 그래서 며칠 전에 제가 윤금이랑 밀가루 빻아두었습니다. 둥그렇게 잘 반죽해서 누룩틀에 넣어 발로 꾹꾹 밟아두었죠. 지금쯤 누룩곰팡이가 알맞게 피어올랐을 거구먼요.”

또 장덕이가 먼저 나섰다. 이번엔 윤금이도 장덕이 말에 맞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천생연분 아니랄까 봐 일할 때도 놀 때도 죽이 척척 맞았다. 두 사람은 몸을 털고 일어나 대나무 도시락을 챙겼다. 장덕이가 바랑을 걸머지고 솔잎을 따다 만 큰 소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윤금이도 장덕이를 따라가고 매창은 느슨해진 치마폭을 잡아당겨 올려서 치맛말기를 질끈 동여매고 그 뒤를 따라갔다.
아침부터 집 안이 부산스러웠다. 윤금이와 장덕이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술을 빚자니 꽤 많은 양의 쌀을 씻어야 했다. 시루에 찌고 어쩌고 하려니 일거리가 많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윤금이가 시루에 쪄서 꼬들꼬들하게 만들어놓은 고두밥을 멍석 위에 펴서 말리고 있었다. 한쪽에선 장덕이가 절구에 누룩을 찧는 중이었다. 이제 그 두 가지를 함께 버무려서 항아리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사나흘 적당한 온도를 유지시켜주면 뿌연 탁주가 만들어진다. 그럴 때 광에 들어가면 항아리 속에서 뽀그르르 술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라앉은 누룩과 밥이 술밑으로 잘 만들어지면 이 술밑에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체로 걸러낸 것이 탁주다. 청주가 마시고 싶을 땐 용수 속에 고인 맑은 술을 떠내면 된다. 그 생각을 하자 매창의 입에 침이 고였다.

“아씨, 술 만드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지만 아씨가 요새 술이 느신 것 같아 걱정이어요.”

윤금이는 익어가는 술내에 코를 킁킁거리면서 매창을 돌아보고는 눈을 맞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술이 늘긴 늘었다. 혼자 지내는 밤이 많을수록 갈증이 심했고 물로는 그 갈증이 달래지지 않았다. 매창 자신도 술을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날 때 배가 찢어질 듯 아플 때가 많다. 몸이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래야지. 나 혼자 다 마시려고 담근 술도 아닌데 말이다.”

윤금이는 아직 못 다한 말이 남았다는 얼굴로 매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끝내 그 말을 밖으로 내보지는 않았다. 매창이 그 말을 알고도 남는다는 걸, 그 맘까지 알고 있다는 걸 아는 표정이다. 강아지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며칠 전에 윤금이가 얻어다 준 누런 삽살개다.

“숨 쉬는 것 하나는 곁에 있어야지요.”

윤금이는 철든 소리를 하며 개 밥그릇을 마루 밑에 놔주었다.

“좀 클 때까지는 집 만들어주지 말고 그냥 여기서 살도록 해요. 아씨도 이것이 요만큼 가까이 있어야 마음이 더 놓일 것 아니어요.”

살아 있는 것, 정 줄 대상이 곁에 없는 자신을 걱정하는 윤금이의 속마음이 매창은 고마웠다. 여린 마음에 장덕이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 미안했던 거다.

“목숨 가진 것 끼니때마다 밥 거두기 번거로워 어찌 키우느냐?”

“그건 제가 챙길 테니 아씨는 신경 쓸 것 없다니까요. 그냥 가끔 이놈이 어디 돌아다니나 찾아보기만 해요. 누렁이도 아씨가 좋은가 보네요. 아까부터 아씨 얼굴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참 이름은 그냥 누렁이라고 지었어요. 생긴 게 그러니 고대로 불러줘요.”

“누렁아!”

강아지는 그게 제 이름인줄 알고서 앞발을 허공에 대고 내둘렀다. 매창은 큰 소리로 깔깔깔 웃었다. 오랜만에 내는 큰 웃음소리였다. 식구가 하나 늘었다. 두 끼도 빠듯한 살림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든든했다. 그녀가 금대나 혜천으로 나들이 갈 때면 누렁이도 졸졸 따라왔다. 마치 윤금이 뒤를 따라다니는 장덕이 같았다. 예전에는 금대의 너럭바위에서 거문고를 탔지만 요새는 누렁이와 혜천의 약수를 나눠 마시며 저 아래 관아와 객사를 내려다보고 앉아 있다 내려온다. 좀 더 걸어서 상소산 중턱까지 올라갈 때도 있는데 아직 여린 생명이라 반 식경쯤 걷고 나면 헉헉댔다. 그러면 매창은 누렁이를 들어서 안고 걷는다. 손바닥에 물컹 잡히는 배가 따뜻하다. 품에 안고 살살 걸어 내려오는 동안 누렁이는 잠이 들었다. 가위눌림도 악몽도 없이 새근거리며 쿨쿨 잤다. 참으로 탐나는 평안한 잠이었다.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저서로는 소설집『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On the road』, 에세이집『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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