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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균형의 왕 #12

중앙일보

입력

<김봉현 전격 해부>

황상민이라는 사람이 있다. 전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다. ‘전’인 이유는 당연히 둘 중 하나다. 사임 혹은 해고. 안타깝게도 그는 후자에 해당한다. 혹 사회면 뉴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를 ‘김연아 논란’이나 ‘박근혜 생식기 발언’으로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당신이 예상하는 대로 후자의 사건은 그의 해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뜬금없이 타인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그로 인해 최근 나의 삶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 나와 관련이 있다. 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개발한 'WPI' 때문이다. 심리학자 황상민이 한국인의 특성을 연구한 끝에 개발했다고 하는 성격유형검사 WPI 덕분에 최근의 내 삶은 한층 더 좋아졌다. 헐, 지금 내가 남을 인정하고 있는 거야? 안 되는데. 내 성공과 행복은 온전히 모두 나의 힘 덕분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왠지 분하긴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ㅇㅈ.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나는 이런 유의 검사를 거의 믿지 않는 사람이다. 혈액형은 물론 에니어그램이나 MBTI에도 허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란 존재다. 하지만 WPI는 달랐다. WPI는 복합적이고 세심했으며, 인간에 대한 훌륭한 통찰이 살아있는 성격검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한동안 WPI를 주변에 소개하고 다녔다. 실제로 내 USB에는 ‘WPI 검사한 사람.hwp'라는 파일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팩트체크를 위해 압수수색이 들어온다면 마땅히 응할 용의가 있다. 이 한글문서에는 현재 35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모두 나로 인해 WPI 검사를 해본 사람이다. 참고로 마지막 사람의 이름은 ’정지은‘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 검사가 약 1만 원을 결제해야 하는 유료라는 점이다. 즉 이들은 모두 1만 원, 아니 세금 포함해 1만 1천 원을 자기 돈으로 내고 이 검사를 했다. 검사 시켜놓고 정작 돈은 안 대주냐는 원성의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지만 진실은 그와 다르다. 나는 억울하다. 자신의 삶을 바꾸는 비용으로 고작 1만 1천 원밖에 들지 않았으니 오히려 이들은 모두 나에게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시디 한 장씩이라도 선물해야 마땅하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WPI가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삶의 해법이나 지혜를 알려준 건 아니다.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쥐여 준 것도 아니다. 대신에 WPI는 내게 여러 가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예를 들어 나는 스무 살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음악을 정말 좋아하지만 나에게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는 것 같아. 가사가 주는 감명은 논리나 이성에서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난 어떤 가사를 보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긴 해도 가사를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난 음악을 좋아하긴 하는데 어쩌지. 그럼 음악을 듣고 감상을 적고 해설을 하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그런 게 나한테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내가 스무 살 때부터 앨범 리뷰를 쓰기 시작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꼭 뮤지션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러한 강박 때문에 예술가로서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나는 왜 인정받지 못할까?” 같은 고민으로 불행해지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후, WPI는 나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기계 같은 타입”. 즉 예술을 사랑하지만 예술가보다는 다른 위치와 맥락에서 예술에 관한 일을 하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WPI는 예술을 사랑하니까 무작정 예술가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고, 기계 같은 타입이니까 예술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라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마치 내가 스무 살 때 했던 생각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이 평가에서 통찰과 균형을 동시에 보았다.

WPI가 확인시켜준 것이 또 있다. 여러 개가 있지만 하나만 더 말해보자. 나는 몇 년 전부터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일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독립적이고 개인적이다. 프리랜서가 꼭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을 뜻하지는 않는다. 둘은 교집합이 많지만 엄연히 다른 점도 있다. 아무튼 나는 한동안 내가 일하는 방식에 관한 고민이 꽤 있었다. 사실 손에 잡히는 문제 같은 건 딱히 없었지만 ‘확신’이 없었다. 이렇게 일하는 게 편하고 나에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이런 방식에 길들여져 버리는 건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계속 일하다 혹시라도 고립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WPI는 나에게, 내가 일해온 방식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많은 것을 성취한 원동력에 가깝다고 말한다. 일하는 방식이 나라는 사람에게 잘 맞았기에 잘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WPI에 관한 황상민의 책을 읽어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마치 나의 분신이기라도 한 듯 나와 똑같은 고민을 털어놓고, 나와 똑같은 성향을 곳곳에 드러낸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많구나. 남들과 좀 다르다는 것이 ‘고쳐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구나. 난, 틀리지 않았구나. 혹시라도 ‘내가 듣고 싶은 좋은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에 WPI를 신뢰한다고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핵심은 ‘나의 고민은 내가 저지른 잘못이나 내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유형 자체’임을 WPI가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황상민은 현재 ‘황심소’라는 팟캐스트도 하고 있다. 황상민의 심리 상담소. 말 그대로 사람들의 고민 사연을 받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식이다. 얼마 전에는 나의 WPI 그래프와 거의 똑같은 사람의 상담 사연이 나오기에 평소보다 더 유심히 들었다. 황상민은 이 사람이 털어놓은 고민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분은 남들이 보기에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도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분이에요. 실제로도 잘난 면이 있고요. 그런데 남들은 이 분을 어떻게 볼까요? 보통 재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 잘났다, 지 맘대로 사네, 이렇게 생각해요." 음. 나와 거의 똑같은 그래프를 가진 사람에 대한 말이니 결국 나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거, 꽤 맘에 드는데?

내친김에 황상민의 책에 있는 내용을 옮겨본다. 나(같은 유형)에 관해 그가 해놓은 말이다.

- 삶은 일을 하는 과정이다. 오로지 일! 일을 통한 성취에서 존재감을 획득하는 종족. 일이 생활이고 생활이 곧 일이다. 유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잣대가 높다. 취미생활도 일단 꽂히면 오타쿠처럼 파고들어 마니아가 된다.
-> 어떻게 알았지? 내가 <명탐정 코난>을 만화책뿐이 아니라 극장판도 다 보고, 문하생이 그린 특별판도 다 사서 모으는걸?

- 목표 수준이 높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시작하지도 않는다.
-> 어떻게 알았지? 그래서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한다는걸?

- 일하는 기계 같은 유형이지만 예술을 좋아하고 조예가 깊다. '예술을 사랑하는 기계' 같은 타입이다.
-> 앞서 말했으니 생략.

- 많은 인간관계가 일을 통해 맺어진다. 이것은 이런 유형의 숙명이다. 일과 무관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반드시 공통되는 지적 관심사가 있어야 한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사람을 만난다. 그렇기에 사람 간의 교감 자체를 중시하는 유형에게는 언뜻 이해 불가능한 유형이다. 의도하거나 계산된 행동이 아님에도 타인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 어떻게 알았지? ‘목적’이 있어야 사람을 만나는 나 자신을 발견한 후 한동안 괴로워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물론 그 목적이란 것이 사람을 이용하거나 꼭 일과 관련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만남의 목적에 관해 나 자신을 스스로 설득하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의욕 자체가 사라지는 나를 어떻게 알았을까?

- 남들이 "잘났어, 정말!"이라고 생각해도 정작 자신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남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지낸다.
-> 뭐 그냥 그런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라고 그래.

- 사람에 대해 좋고 싫은 게 분명해서 자기랑 잘 맞는 사람과는 굉장히 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완전히 배척하거나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사람을 좁고 깊게 사귀는 대신 책임감이 강하다.
-> 그래서 나에 대한 ‘선 안’의 사람과 ‘선 밖’의 사람의 평가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나도 알고 있지.

- 좋아하는 것에는 완전히 집중하고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것은 그냥 대세에 지장이 없는 쪽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 책 표지랑 판형은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요, 보도자료는 어떻게 쓰셔도 상관없어요.

- 좋고 싫은 것이 명확하고 깔끔해 인정머리 없어 보인다.
-> 봉현아, 사람은 좋은 사람 말 듣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 남의 걱정을 들어주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 사람이 스스로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조언을 해주기 싫어한다. 내 걱정은 내 스스로 해결하니까 남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너에게 애정이 없어서 내가 널 안 도와주는 게 아니야. 오해하지 마. 다만 네가 스스로 해결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 사람들이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너의 속을 모르겠다. 네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다."면서. 물론 본인은 아무 잘못한 게 없으나 본인의 성향이 타인에게 이런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고로 억울해도 내가 좀 손해를 본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 좀 동요도 하고 화도 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니 가끔 타인이 그 상황이 주는 불안감을 나에게 공격적으로 풀 때가 있다.

- 자기 나름대로 남에게 신경 써주는데 인정 못 받는 경우가 많다.
-> 그래도 괜찮아... 신은 알겠지...

-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게 좋다. 보통 이런 유형은 유능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 하지만 자주 엇갈리더라.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이랍니다. 좋은 것 말고도 나쁜 것도 다 솔직하게 넣었죠? 하하. 예쁘게 봐주세요. 물론 안 그래도 존중할게요.


작가 소개    
대중음악 평론가, 혹은 힙합 저널리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네이버뮤직>, <카카오뮤직>, <에스콰이어>, <씨네21> 등에 연재 중.
레진코믹스 힙합 웹툰 <블랙아웃> 연재 중.
<서울힙합영화제> 기획 및 주최.
<건축학개론>을 극장에서 두 번 봤고 두 번 다 울었음.

주요 저서 및 역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우리 시대의 클래식』,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나를 찾아가는 힙합 수업』
『제이 지 스토리』,
『더 에미넴 북』,
『더 스트리트 북』,
『더 랩: 힙합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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