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명예석사 졸업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식순에 따라 학위 수여가 있겠습니다. 석사 졸업장을 받는 학생과 명예석사 졸업장을 받는 관계자께서는 단상으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김수현양과 김양의 아버지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앞 오른쪽에는 김양이 서 있고, 왼쪽에는 김양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졸업 축하해!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잘해 왔기에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먼저 난치병으로 고생 끝에 졸업하는 김양에게 졸업장을 수여하면서 한 말이다.

재정적 지원 아닌 졸업생의 힘 돼준 사람의 정성 기리고
그간 받은 주위 도움 어려운 이들에 나눔으로 돌려주길

다음으로 김양의 아버지에게 명예석사 졸업장을 수여했다. “아버님! 이제 석사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진정 명예로운’ 석사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명예석사 졸업장을 읽어 내려갔다. ‘학위명: 명예석사. 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러운 딸 김수현양이 우리 대학원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영예의 졸업장을 받기까지 모든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정성을 치하하고 그 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명예석사 학위를 수여합니다’. “아버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지요?”

명예석사 졸업장 수여는 계속됐다. “수진이 할아버지십니다. 87세이신데 정말 정정하시지요. 오래오래 사시면서 수진이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으면 같이 놀아 주셔야 합니다.” “원장 선생님, 100세까지만 살게요. 요즘 100세 100세 하잖아!”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고 졸업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민종군이 졸업하는 것은 아내 덕분입니다. 아내는 직장생활을 한다고 들었는데, 출산을 할 때도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또 아기 양육도 혼자 했다네요. 남편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요. 아기도 함께 왔나요?” 좌석에서 졸업생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섰고, 많은 사람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졸업생이 졸업하기까지 알게 모르게 도와준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학술적인 공헌이나 재정적 기여가 아닌 ‘오늘의 주인공’을 있게 해 준 사람 중 한 분을 졸업생으로부터 추천받아 졸업생의 석사 졸업장에 상응하는 명예석사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첫해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부터는 관심이 높아져 졸업생 숫자와 동일한 수의 명예석사 졸업생들의 명단을 추천받았다. 졸업식 준비를 위해 나는 졸업생이 학교에 입시지원서를 낼 때 함께 제출했던 자기소개서를 찾아 읽어 봤다. 또 평소 학생 면담을 통해 가족사를 기억해 뒀다. 기억해 둔 내용을 활용하면서 졸업식장의 분위기를 유도해 나갔다. 명예석사 졸업장을 받는 사람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명예석사 졸업장을 받는 사람은 다양했다. 심지어 부모님 없이 살아오는 동안 보살펴 준 은사도 있었다.

그중 가난으로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다는 80대 할머니가 있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를 대신해 손자를 키웠다. 70세가 넘을 때까지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게 전달해 주고 받은 돈으로 손자 학비에 보태기도 했고, 아파트 청소부로도 일했다. 손자가 낡은 옥탑방에서 자취를 하는 기간 내내 할머니는 자주 들러 밥해 놓고 손자를 기다리기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도 했다. 단상에 올라온 키 작은 할머니는 손자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두 눈에 눈물방울이 가득 고여 있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키 크고 듬직한 손자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할머니는 졸업식 날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 명예석사 졸업장을 가슴에 꼭 품고 갔다고 한다. 요즘도 할머니는 손자와 함께 가끔씩 명예석사 졸업장과 졸업 때 찍은 사진을 꺼내 놓고 졸업식 날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나는 썰렁하고 지루한 졸업식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한 축제의 분위기로 이끌고 싶었다. 또 ‘빛나는 졸업장’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성취이기도 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받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위의 도움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임을 기억하고, 이제껏 받아 왔던 도움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눔으로 돌려주라’는 뜻에서 명예석사 졸업장을 수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졸업식장은 졸업생과 명예석사 졸업장을 받는 사람들, 그 가족·친지들로 붐볐으며 웃음소리와 꽃향기가 넘쳐 나고 있었다.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