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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직격 인터뷰

“생활정치가 중요한데 한국은 늘 영웅만 찾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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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선 하차한 서울시장 박원순

마음을 비웠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말에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성공한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자신이 가장 적격자라고 강조했다. 퇴임 후 거리에서 시민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될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올해로 6년째를 맞는 최장수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풍부한 시정 경험이 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정당적 기반이 없는 현실정치의 한계를 미처 깨닫지 못한 회한은 숨기지 못했다. 대선 재도전 의사를 애써 부인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아직 남아 있는 1년 반의 서울시장 임기에 매진하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집무실은 사무실 내부에 마련한 시장 전용 자료실이 인상적이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이중 책장에 자료가 빼곡히 차 있다. 만기친람형 시장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사진 신인섭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의 집무실은 사무실 내부에 마련한 시장 전용 자료실이 인상적이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이중 책장에 자료가 빼곡히 차 있다. 만기친람형 시장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사진 신인섭 기자]

불출마 선언을 하고 나니 어떤가.
“몇 달간 여행 갔다 집에 돌아온 느낌이랄까. 마음 편하고 좋다.”
한때 최고 지지율의 유력한 대선후보였는데.
“그건 옛날 얘기이고. 몇 달 뛰어보니까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간의 활동 경험으로 국가를 운영할 콘텐트 같은 것은 자신 있다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조직도, 정치세력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국민적 지지도 못 얻었고…. 모든 게 나 자신이 부족한 탓이다.”
국민들이 왜 박 시장에게 마음을 안 줬을까.
“지난 5년간 내가 한 말을 분석한 기사가 나왔던데, ‘시민’과 ‘서울’이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더라. 내가 그동안 너무 ‘시민 바보’ ‘서울 바보’였던 거 같다. 그러다 보니 (전국적인) 준비가 좀 부족했다.”
최순실 사태에 피해를 본 측면이 있다.
“그것도 준비가 돼 있었다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던 거다. 상황을 탓할 수 없다.”
조기대선이 아니었다면 서울역 고가공원 효과로 지지율이 반등하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고가공원을 만든 게 아니다. 처음 시장 될 때 주변에서 이명박 전 시장처럼 큰 거 ‘한 방’ 해서 그걸 지렛대로 대선 나가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서울역 고가는 위험해서 철거를 해야 하는데 재활용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비용도 덜 들고 보행친화적으로 세계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묘에서 남산까지 데크로 20분 안에 갈 수 있게 만드는 세운상가 계획처럼 여러 가지의 보행친화 사업 중 하나다.”
고가공원 완공 시기를 4월 경선에 맞췄다는 지적도 있다.
“그건 더 빨리 할 수도 있었는데 꽃 피고 걷기 좋은 4월 말에 맞춘 거다. 기존 고가를 안전조치만 해서 보행도로로 만드는 데 불과한 거 아닌가. 공공기관 사업이라는 게 구상, 용역, 타당성 분석을 거쳐 각종 승인 받아 착공하는 데 적어도 3~4년 걸린다. 내가 취임한 지 6년 차 아닌가. 그러다 보니 올해와 내년에 결실들이 많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다. 올해만 해도 세운상가 1차 개통, 문화비축기지, 마곡 중앙공원 식물원 개관을 한다. 이명박 시장은 4년 동안 청계천 하나만 죽어라고 했지만 나는 다양한 측면에서 혁신을 이뤘다.”
박 시장이 정책적 준비가 잘돼 있어 가장 버거운 상대가 될 거라던 문재인 전 대표의 말이 그건가 보다.
“언론이 너무 후보들에 대해 경주마식 보도를 한다. 후보가 걸어온 길과 성취, 비전을 비교하고 분석하기보단 줄을 세워 순위를 매기기 급급한 것 같다. 언론 세태가 그렇다 보니 실패한 대통령이 줄줄이 나온 거다. 우리나라에 성공한 대통령이 있나. 나는 정말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퇴임 후 손자 손잡고 길거리 다니며 시민들하고 인사하고 재래시장 가서 국밥 한 그릇 먹으며 사는 얘기 할 수 있는….”
좋은 사업 많이 했는데 왜 부각이 안 됐을까.
“그런 대통령의 모습에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안 된 건 우선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만, 우리 사회가 생활정치의 중요성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가까운 곳에서 국민이 먹고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늘 영웅만 찾는 거 같다. 그래서 거대담론이나 얘기하고 정치세력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을 기대한다.”

우리나라에 성공한 대통령 있나
거기에 내가 가장 적절한 후보
쉽게 시장 돼 정치 쓴맛 몰랐다
정치세력 없어 국민 지지 못 얻어

너무 쉽게 시장이 돼서 자만한 게 아닌가.
“경선이 있긴 했지만 너무 쉽게 되는 바람에 정치의 쓴맛을 몰랐다. ‘박원순 제압문건’ 같은 네거티브가 많았는데 거기에 무심했다. 열심히만 하면 다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게 다 내가 확장성 있는 후보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시장 1기 때는 무상급식 등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내놨는데 2기 때는 마이스(MICE) 사업이나 청년주택 같이 보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집토끼와 산토끼를 모두 놓친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닌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늘 실사구시적으로 생각해왔다. 내가 출범시킨 희망제작소의 모토가 ‘21세기 실학운동’ 아니었나. 좌파나 우파, 보수나 진보가 다 뭔가. 국민의 삶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백성을 먹이고 살리는 것이 무상급식이요 복지 강화이고,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마이스이고 공유경제라고 생각했다. 서울시를 보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이고 세계의 미래가 보인다고 믿는다. 얼마 전 영국신문 가디언이 세계 5대 혁신시장을 뽑았는데 내가 포함됐다.”
그런 걸 홍보했어야 지지율이 올랐을 텐데.
“언론이 해줘야지,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하나. 그 외에도 회의하기 좋은 도시 1위, 세계의 부자 여행객들이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 도시 1위, 전자정부 도시 1위가 서울이다. 모리재단의 시티파워 인덱스를 보면 서울이 세계 6위다. 우리 앞에 런던·뉴욕·파리·도쿄·싱가포르밖에 없다. ‘실리콘 밸리는 서울을 배워라’고 뉴욕타임스에 썼고 네이션에는 ‘미국 도시들이 트럼프 대통령 밑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면 서울을 봐라’는 기사도 났다. 국가 경제는 어렵지만 서울은 막강한 도시경쟁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체감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안에서만 보면 모른다. 외국에서 오래 있다 오면 금방 안다. 얼마나 깨끗해지고 살기 좋아졌는지. 그게 우연히 된 게 아니다. 내가 작은 것들을 끊임없이 챙긴 결과다. 국정도 마찬가지다. 거대담론만 얘기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런 훌륭한 시장이 뜨지 못하고 불출마 선언을 해야 하다니….
“너무 짧게 바라보지 마라. 사람 일을 누가 아나. (웃음) 농담이고 시정이나 열심히 해야지.”
그러려면 현실정치에도 적응돼야 할 텐데.
“물론 그런 게 필요하고 나도 노력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정치가 정당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여의도 정치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국민의 삶을 책임져주는 정치를 바라는 여론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선택을 못 받았지만 그런 바람이 불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서울 도시 경쟁력은 세계 6위
슈밋 구글 회장도 서울 빅팬
최장수 시장으로 패러다임 바꿔
베이징과 공조해 모빌리티 혁명

박 시장이 관심을 독점하고 싶어 해서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그보다 만기친람형이라는 말은 있다. 시민운동 할 때 맡기고 싶어도 맡길 사람이 없어서 직접 보완하며 일하다 보니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을 거다. 시에서도 주무관들에게 직접 지시하는 경우가 있다 보니 혼란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고를 받을 때 주무관까지 다 들어오라고 한다. 지시가 부시장-본부장-실·국장-과장-팀장-주무관으로 내려가면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 ‘시장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주무관이 알면 소통이 더 잘될 것이다.”
민선 최장수 시장인데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나. 기본적으로 내가 한 일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하드웨어적 방식에서 소프트웨어적 방식으로, 토건 중심에서 삶의 질 중심으로, 제조업 위주에서 관광 같은 서울 고유의 산업으로 바꿨다. 크게 보면 혁신과 협치를 통해 바꿔낸 게 많다. 쓸데없는 사업을 안 해서 채무 7조원을 감축하고 복지를 4조원에서 8조원으로 두 배 늘렸다. 복지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1500명을 더 채용해 찾아가는 동주민센터를 만들었다. 국공립어린이집도 1000개 더 지었고. 그렇게 해서 일자리를 22만 개 늘렸다. 복지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있는데 복지란 결국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을 증대하고 소비를 진작시키며 중소기업을 돌게 하고 다시 세수를 늘리는 선순환 고리인 것이다.”
그래도 22만 개는 과장 아닌가.
“나도 숫자를 잘 안 믿지만 일반적인 계산법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다. 관광만 해도 해외 관광객이 900만 명일 때 내가 시장이 됐는데 그게 지난해 1350만 명으로 늘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문제 때문에 쉽진 않겠지만 2018년까지 2000만 명이 목표다. 이것 또한 40만 개의 일자리가 생기는 효과가 있다.”

영 믿지 못하겠다는 기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박 시장은 기자가 관심 있는 분야 하나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것에 대해 서울시가 어떻게 콘텐트를 갖춰왔는지 설명하겠다는 거였다. 서울이 걷기 편한 도시가 된 것을 평가한다고 했더니 박 시장은 기자의 팔을 잡아 시장실 안에 따로 마련된 자료실로 이끌었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이중 서재에 각종 자료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박 시장은 보행 정책 관련 파일들을 꺼내 펼친 뒤 꼼꼼한 설명을 이어 갔다.

역시 최장수 시장이라 그런지 모든 정책을 다 꿰고 있는 거 같다. 좀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유도질문은 하지 마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고 앞으로 서울시정을 잘 돌봐서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모두 완결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완성을 위해 3기 시장에 도전할 생각인가.
“인권변호사,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그리고 서울시장까지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내가 처음부터 뭘 해야겠다고 준비한 적은 없다. 뭔가를 열심히 하다 보면 다른 뭔가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겨나더라. 그래서 나는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했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한 적이 없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서울시장의 꿈을 가진 것 같던데. 시민들의 뜻을 잘 이어 갈 수 있을까.
“그건 시민들이 판단할 거다.”
정당적 기반이 약해 좌절을 겪은 건데 국회에 입성할 생각은 없나.
“차츰 생각해보겠다. 서울시장 임기도 많이 남아 있고, 1년 앞도 어려운데 몇 년 앞을 어찌 내다보겠나.”
앞으로의 시정 계획은.
“서울이 갖고 있는 힘도 런던이나 뉴욕 못지않다. 에릭 슈밋 구글 회장을 중국에서 만났더니 자기가 서울의 ‘빅팬(big fan)’이라고 하더라. 그렇게 에너지 넘치는 역동적 도시가 어디 있느냐고. 그가 구글 캠퍼스를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서울에 만든 것도 서울의 잠재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잠재력을 일깨워 세계 6위인 도시경쟁력을 4, 5위로 끌어올릴 것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려면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닌 압도적 우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모빌리티(mobility·이동수단)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집에서 직장까지의 이동성 혁명. 탈 거리가 꼭 자동차뿐인가. 스케이트처럼 움직이는 것도 있고 발에 달고 날아다니는 것도 있던데, 앞으로 혁명적인 이동수단이 나올 것이다. 대비를 늦추지 않고 서울이 꼭 그것을 선도할 것이다. 올해부터는 베이징(北京)과 협력할 예정이다.”

박원순은 …

1980, 90년대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94년부터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를 지내면서 시민운동의 영역을 나눔과 기부로 확대했다. 그 공로로 200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리핀 막사이사이상(공공봉사 부문)을 받았다. 2006년부터 21세기 실학운동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활동하다, 2011년 백두대간 종주에 나서 49일 동안 걸으며 정계 입문이 시대적 소명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당선돼 제35대 서울시장에 취임했으며 2014년 재선됐다.

글=이훈범 논설위원
사진=신인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