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그대’ 같은 중국음식점이다. 서울 서쪽 끝 공항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라이차이(來菜/서울 강서구 송정로 43/전화 02-2661-7958)’. 맛집 찾는 눈이 밝은 지인의 귀띔을 듣고 설 연휴 셋째 날 찾아갔다. 하도 외진 곳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 세 차례 8가지 음식을 먹어봤다. 결론은 ‘송골매’가 부른 저 노래의 가사에 근접했다. 내 마음을 조금 빼앗겼다. 음식은 호텔신라 중식당 ‘팔선’과 비슷하지만 값은 요리 30여 가지 2만원대, 식사 13가지 6000~1만2000원으로 동네 중국집 수준이다. 옥호는 ‘래의 요리’라는 뜻이다. 오너셰프 김정래(39)씨의 이름 끝 자에서 따왔다. 2014년 8월 20일 개업해 이제 2년 반 된 새내기다.
‘팔선’과 음식이 비슷한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스토리가 있다. 김씨는 조리사 입문부터 개업 직전까지 만 12년을 호텔신라에서만 일을 배운 순혈 ‘팔선’ 출신이다. 강릉영동전문대(현 강릉영동대) 호텔조리과에서 공부했다. 논란이 있긴 했지만 유명한 에드워드 권(46) 셰프가 학과 선배다. 졸업반이던 2002년 5월 실습생으로 호텔신라에 처음 갔다. 1차 이탈리아식당, 2차 중식당 실습을 했다. 중식당 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2개월 아르바이트 기회를 얻었고, 자리가 생겨 다시 1년짜리로 이어졌다. 아르바이트생으로 2년 일한 뒤 계약직으로 2년을 근무했다. 4년간 열성으로 일한 덕분에 2006년 정식직원이 됐다. 12년 동안 전표 4년, 면판 1년, 칼판 3년, 불판 4년을 수련했다. ‘팔선’에서 배워 주방 공부 전 과정인 4개 세션을 모두 거친 사람은 2명이다. 1명은 화교, 한국인은 김씨뿐이다.
‘라이차이’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왼쪽 벽에 ‘팔선’ 시절 사진을 여러 컷 게시해놨다. 몇 컷에는 ‘사진 촬영은 불가합니다’라고 써 붙여놨다. 이건희 회장 부부가 갑자기 찾아와 식사를 하고 가던 날 직원들과 찍은 사진도 있고, 호텔 리노베이션 작업을 진두지휘한 이부진 사장이 직원들 노고를 치하하며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김씨의 자부심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식당은 아담하다. 4인 테이블 6개와 1인석 4개가 있다. 테이블에는 웬만한 중식당에 놓여 있는 양념류가 전혀 없다. 여기서도 그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읽힌다. ‘잘 맞춰드릴 테니 나온 대로 드시라’는 말 아니겠는가. 음식은 실제 간이 잘 맞는다. 그는 자기 음식점을 시작하면서 손님들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다. “▷신선한 재료를 셰프가 직접 고릅니다 ▷재료소스를 쓰지 않고 셰프가 직접 만듭니다 ▷모든 요리는 가격이 아닌 호텔신라(출신) 셰프의 양심으로 조리합니다”. 모든 음식은 주문 즉시 조리를 시작한다. 주방에 직원 2명을 데리고 일하지만 준비작업 이외의 본 조리는 90% 이상 직접 한다.
식사시간 손님들 테이블을 살펴보니 가장 많이 보이는 음식은 짜장면(6000원)·해물짬뽕면(8000원)·안심탕수육(2만3000원)이다. 김씨에게 권하고 싶은 음식을 물으니 누룽지탕(2만2000원)·중화잡채(1만8000원)·일품가지(2만8000원)를 꼽았다. 하루 전 예약해야 먹을 수 있는 레몬새우(2만4000원)·특색냉채·오향장육·난자완스·멘보샤·XO소스해산물두부(각 2만8000원)·조엽맥골(갈비튀김/3만2000원)·우럭찜(싯가)도 그가 나름 자신 있어 하는 메뉴다.
그는 비싼 재료 한두 가지 빼고는 식자재를 호텔신라와 같은 걸 쓴다고 한다. 화학조미료는 아예 쓰지 않는다. 호텔에서 쓰지 않기 때문에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걸 넣으면 간을 맞출 수 없다고 한다. 주변에서 그거 없이 중국집을 어떻게 하느냐고 하지만 배운 적이 없어 어쩔 수 없단다. 파·마늘·기름만으로 기본 맛을 낸다. 다른 사람보다 파·마늘을 많이 쓴다. 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다져놓은 것 사다 쓰지 않고 즉석에서 다져서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잔 일이 많다.
새우볶음밥을 먹어보면, 고온의 웍에서 볶아 파·마늘 향 잘 머금은 기름이 고르게 입혀진 밥알 하나 하나가 살아서 약동하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불맛의 진면목이 이런 것일 터이다. 탕수육은 두툼한 안심을 얇게 감싼 반죽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폭신하게 잘 튀겨져 누구나 좋아할 맛이다. 소스는 내용 복잡하지 않고 간결한데 단것 안 좋아하는 내 입에는 약간 달아 보통 입맛에는 맞을 듯했다. 소스의 녹말 농도는 센 편이어서 식으면 끈적이는 단점이 있다.
누룽지탕은 가지런한 크기의 네모 반듯한 누룽지를 바로 튀겨 뚝배기에서 끓는 국물에 올려 내오는데 부드럽고 깊은 국물 맛이 비단결처럼 입안을 가득 채운다. 신선한 해물도 많이 들어가 고급스러운 인상이지만 동네 주민들은 잘 모르는 음식이어서 주문이 많지 않다고 한다. 짜장면은 전반적으로 맛이 깔끔하고 면도 잘 삶았다. 고명으로 올린 오이채는 한 가닥씩 가끔 씹힐 때마다 상큼한 향으로 심드렁해지던 미각을 일깨운다. 내 입에는 역시나 소스가 많이 달았다.
일품가지는 가지를 토막 쳐 두 겹으로 가르고, 사이에 다진 새우 살을 샌드위치처럼 채워 넣어 튀긴 걸 웍에서 어향소스에 굴려 만든 음식이다. 튀긴 가지와 탱글한 새우 살이 어우러져 음양의 조화처럼 기분 좋은 식감을 연출하면 진한 어향소스가 혀의 맛봉오리[味?]들을 모두 불러내 맛의 심포니를 연주한다. 주문도 안 했는데 남은 소스에 비벼 먹어 보라며 볶음밥을 한 접시 내왔다. 일행 5명이 먹고는 이구동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약메뉴인 갈비튀김은 삶은 돼지 등갈비에 반죽을 입혀 튀긴 음식이다. 갈비살에 눈이 쌓인 듯 튀김 옷이 잘 입혀졌다. 중국음식이 대개 1차 조리를 해서 소스에 굴리는 과정을 거치지만 이건 튀겨서 바로 나왔다. 소스는 소금뿐이다. 먹어보면 소금도 필요하지 않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건 기본이고, 기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튀겼다. 튀긴 갈비가 담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중화잡채는 여태 먹어본 중식당 잡채의 상식을 깨는 맛이었다. 당면 가닥마다 양념이 고루 밴 갈색을 띠고, 굵기가 균일한 배추·양파·애호박·고기 채들은 재료의 비율이 잘 맞아 맛의 균형이 탄탄했다. 간장소스에 비법이 있는 듯, 맛이 아주 좋았다.
김씨의 목표는 규모가 있는 중식 레스토랑이다. 호텔신라 ‘팔선’ 수준의 중화요리를 서민도 비싸지 않게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다. 자녀들이 좀 자라면 강릉에 음식점을 열어 고향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기도 하다. 개업할 때 ‘팔선’에서 배운 메뉴를 위주로 60가지를 준비했다. 하지만 음식점이 있는 동네 사람들이 그런 음식을 몰랐다. 이름 모르는 요리는 주문을 안 했다. 공심채볶음·부추잡채 같은 계절 메뉴를 하고 싶은데 손님이 없어 못하고 있다. 가족이 사는 집과 가까운 곳에 음식점을 열다 보니 외진 곳에 자리를 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메뉴를 대폭 줄였다.
그가 요리사의 꿈을 넘어 음식점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2004년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면서부터다. 계획을 세워 생활습관을 바꾸고 요리 기술을 차곡차곡 익히며 준비했다.
부모님은 넉넉지 않은 농부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강릉상고를 졸업한 후 설악켄싱턴호텔에 웨이터로 취직했다. 2년간 근무하며 보니 시골청년 눈에는 놀라운 신세계였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는 인생에서 첫 운이 그 호텔이 입사한 것이고 두 번째 운이 거기서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꼽았다.
군대에 가서 생각해보니 웨이터 일은 나이 들면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평생직업을 찾아 진학을 결심했다. 전문영역도 있고 수명도 긴 조리를 택했다. 학비 적게 들고 부모님 농사 일을 도울 수 있게 고향에 있는 학교를 찾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을 모셔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친구들은 96학번인데 5년 늦은 01학번으로 전문대에 들어갔다.
요리사의 꿈을 가꾸며 서울에서 열심히 실습생으로 일하던 2002년 여름 태풍 ‘루사‘가 왔다. 8월 31일 하루에만 강릉에 871mm의 비가 쏟아졌다.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고기록이다. 대관령 물줄기를 받아내는 남대천과 지천을 안고 있는 성산면에 있던 아버지의 농토는 모두 떠내려갔다. 논밭에 돌만 남고 흙은 다 쓸려나갔다. 전국 재산피해액(5조1479억원) 역대 1위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해 9월에도 초강력 태풍 ‘매미’가 몰아쳐 어렵사리 아물던 아버지의 상처를 다시 난도질했다. 11~13일 강릉에 큰비가 내렸다. 대관령(397mm)·강릉(307.5mm)은 전국 기상계측지점 중 남해(452.5mm)에 이어 2, 3위를 기록했다. 태풍 위력과 최대 순간풍속(60m/s) 역대 1위, 전국 재산피해액(4조2225억원)은 2위였다.
농토 복구에 온 힘을 쏟던 아버지는 불가항력인 자연의 심술에 절망했다. 들꽃이 지듯 세상을 등졌다. 날마다 맛있는 음식으로 손님을 맞는 그는 아버지에게는 한번도 대접을 못했다는 사실이 늘 가슴에 한으로 응어리져 있다.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했고 아버지 사연도 있어서 음식 값을 비교적 싸게 책정했다. ‘팔선’에서 돈 많은 손님들이 먹는 음식을 서민도 먹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열심히 일을 해야 배울 기회도 생긴다. 호텔 출근시간이 오전 7시인데 그는 600~700명 연회가 있는 날엔 4시에 나갔다. 기본준비를 다 마쳐놓고 선배들 출근을 기다렸다. 미리 일을 해놔 남는 시간에 선배들 일하는 걸 기웃거리며 어깨너머공부를 했다. 시간 여유를 만들어 관찰학습 기회로 삼았다. 구경하다가 어느 한 과정에 일이 밀리면 “도와 드릴까요, 제가 해볼까요” 하고 덤볐다. 해보라고 시키면 틈틈이 “이러면 괜찮습니까, 저러면 맞습니까” 하고 선배의 뜻을 물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욕심을 냈다. 평소에도 날마다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했다. 남과 다르게 해야 나에게 일이 온다고 생각했다. 선배들에게 “쟤랑 일하면 편하다”는 평을 듣고 함께 일하자고 찾도록 만들어야 했다.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운도 따랐다. 상고에 다닐 때 학교에 컴퓨터 보급이 한창이었다. 워드프로세서도 배웠다. 호텔에 들어가니 오랜 세월 쌓인 수기(手記) 레시피를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컴퓨터를 다뤄본 덕에 그 일을 도맡았다. 사부의 레시피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작업을 4~5년 했다. 보완작업까지 10년 정도 계속했다. 호텔신라 중식총괄 후덕죽(68) 상무는 불도장을 국내 처음 완성한 것을 필두로 ‘팔선’에서 200여 가지 요리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레시피를 모두 볼 수 있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장 요인으로 운이 첫째이고, 계획을 세워 꾸준히 준비한 게 두 번째였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불판까지 빨리 올라간 것도 그랬다. 자신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팔선’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되니 시간 여유가 생겨 밤에 부업을 했다. 퇴근 후 논현동 야간 중국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오후 11시 30분부터 오전 5시까지 일주일에 5일씩 3개월을 했다. 돈 때문이 아니라 화덕 일을 경험하고 싶었다. 호텔 주방에서는 화덕 근처에 기웃거리면 불판 선배가 막 화를 내 어깨너머로도 배울 수가 없었다. 부업을 하면서 웍 다루는 실습을 열심히 했다.
배워 놓으니 기회가 생겼다. 청와대나 총리공관 같은 곳으로 외부행사를 나가면 일손이 모자랐다. 맡은 일을 얼른 해놓고 불판 선배에게 “바쁘면 제가 좀 볶을까요” 하고 접근했다. 잘하니까 다음 행사부터는 “준비볶음은 네가 해라” 하고 시켰다. 그걸 지켜보던 장금승 책임주방장이 어느 날 “어디서 배웠냐, 잘하는구나” 하고 평가를 해줬다. 마침 화덕 주방장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둬 자리가 비게 됐다. 당시 서열상 5명(화교 3명, 한국인 2명)을 제치고 그가 뽑혔다. 시기·질투가 없을 수 없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하겠다”고 했다. 이런 기회가 쉽게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선배들을 앞지른 ‘원죄’ 때문에 책잡히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일했다. 날마다 1시간 일찍 나가 준비를 해놨다. 그가 나와 있으면 준비가 잘 돼있으니까 일 시킬 분들이 그를 찾았다. 그 기회에 선배들의 기량을 개인지도 받듯이 배웠다. 이런 부지런함은 날마다 새벽부터 논밭에 나가던 농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맛있는 음식 한번 해드리지 못한 게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불판에 올라가니 일반중국집 야간 부업 경험이 도움이 됐다. 신속한 일 처리는 일반중국집 방식이, 맛을 잘 내는 데는 호텔 방식이 유리했다. 호텔은 정해진 틀 안에서만 일을 하지만 그는 외부방식을 암암리에 응용했다. “거지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어디서든 배우려고 했고 기록으로 정리했다. 요리 공부한 걸 기록한 수첩이 15권 있다. 비밀장부다. 그에겐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보물이다. 1년을 기록하고 정수만 뽑아서 새 수첩에 옮겨 적은 뒤 새로운 걸 추가하는 방식으로 해마다 해온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후덕죽 사부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조리법이 문제가 아니다. 조리를 하는 자세와 신념, 음식에 대한 철학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호텔신라를 떠나게 된 것도 스승과의 예기치 못한 갈등 때문이었다. 그가 담당하던 탕수육 소스를 둘러싸고 이견이 생겼다. 예전엔 ‘팔선’의 조리법 계량 단위가 국자·숟갈 등 용기로 돼있었다. 그 기준으로 음식을 하면 조리사마다 양념 양에 편차가 있다. 그래서 g 단위로 바꾸고 음식을 만들어 중식총괄의 승인을 받아 개정한 레시피를 확정했다. 그대로 하는데 어느 날 “소스가 너무 달다”고 야단을 쳤다. 승복할 수 없었다. 정한 대로 만들었는데 잘못했다고 하니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다. 덜 달게 양념을 조정하면 전체 균형이 흔들릴 것 같았다. 당시 몇몇 소스에 대해 손님들 불만이 몇 차례 제기됐다. 다른 조리사에게는 아무 말 없더니 탕수육 소스만 지적하는 듯해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사부가 지적하면 한번도 ‘아니요’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안 나왔다. 몇 년 동안 쌓인 게 폭발했다고 할까, 수긍 않고 버텼다. 주방은 군대 같아서 윗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누구도 No라고 하지 못한다. 윗사람 미각이 그날따라 흔들릴 수도 있는데, 서로 합의한 조리법을 지켰다는 생각으로 버텼더니 아무도 힘이 돼주지 않았다. 그 일로 소위 ‘찍혀’ 오랜 일터에서 나오게 됐다. “강릉 어른들이 말하는 ‘대관령 기질’이 참다가 그때 튀어나온 게 아닌가 싶다”고 회상하는 그는 그때의 소스 조리법 그대로 현재 식당에서 탕수육을 만들어 팔고 있다.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다. ‘대관령 기질’을 그는 “강릉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며 우직한 뚝심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팔선’ 시절 그는 이건희 회장 가족행사나 승지원 행사, 삼성 회장단 행사 등에 자주 나갔다. 이 회장이 건강할 때는 중식을 즐겨 1년에 7~8회는 했다. 어느 행사보다 음식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손님들에게 음식을 낼 때도 회장님 행사 음식 준비하는 마음으로 한다. 그 수준이 안 되면 음식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주차장과 룸이 있는지 묻는 손님이 많은데 없다. 개업할 땐 ‘1년만 버텨보자’고 시작했지만 3년(올 8월)을 채우고는 확장이나 이전을 고민하겠다고 한다. 설·추석만 2~3일 쉬고 연중무휴. 영업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9시30분(주방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