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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국소송' 선고 앞둔 유승준 인터뷰 "테러리스트처럼 된 15년, 고국 땅 밟고싶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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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2일. 이날은 '나나나' '열정' 등의 히트곡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유승준(40·당시 25세)의 삶이 바뀐 날이다. 법무부는 군 입대를 앞두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에게 한국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신체 건강한 남성은 누구나 지는 병역의 의무를 져버렸다"는 거센 비난이 들끓었다. 현란한 춤과 가창력으로 가요계를 주름잡던 톱 스타가 '병역기피자'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5년. 유씨는 "한국행 비자(F-4)를 발급해달라"며 3년째 한국 정부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1심에서 패소한 그는 오는 23일 2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본지는 중국에 체류 중인 유씨를 지난 3일 단독 전화인터뷰했다. 다음은 유씨와 일문일답.

근황이 궁금하다.
"작년 9월부터 중국에서 영화를 촬영했다. ‘Fist of Fury’(가제)란 제목의 액션영화다. 아시아판의 ‘분노의 질주’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지난 12월엔 가족과 휴가도 다녀왔다. 두 아들이 베이징에서 국제학교 다니는데, 큰 애가 5학년, 둘째가 1학년이다. 이들과 동남아·하와이에 다녀왔다. 지난 2015년 아프리카 인터넷 방송 이후부터는 특별히 어떤 계획을 잡지 못했다. 그때 기억으로 마음 무겁게 지냈다."
지난해 9월 1심 패소 당시 재판부는 유승준씨의 입국 거부 조치와 관련해 ‘사회의 선량한 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라고 판단했다. 수긍하나.
"말씀드리기 앞서 최근 여행에서의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고 싶다. 해외 여행에서 한국 중고교생을 자주 마주쳤다. 난 사실 외국에서 한국인들 마주치면 부담스럽다. 그렇지만 외국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먼저 말을 해주고 싶더라. 예전에 가수 활동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해라', '나라 세우는 일꾼 돼라'는 얘길 했다. 피부가 검고 근육질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웃겼을 것이다. 처음 보는 아저씨일텐데 '파이팅'하고 답변해주더라. 중요한 건 이들은 내가 활동할 때 태어나지도 않은 학생들이란 점이다. 대학생 대부분도 날 모른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이처럼 많은 데 내가 ‘사회의 선량한 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인물인가. 병역 문제로 이미 난 15년 간 한국 땅을 밟지 못 했다. ‘병역기피자’라는 불명예도 씌어졌다. 26~41세까지 15년 간인데 한창 꽃피울 나이에 한국 땅을 못 밟고 (병역 비리자의)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 돼버렸다. 내 사건 이후에 해외 영주권을 가진 연예인은 다들 군 입대를 해서 비교가 되더라. 톱스타가 군 입대만 하면 내 이름이 거론됐다. 이렇게 보면 (역설적으로) 오히려 나 때문에 나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경각심이 생긴 게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재판부가 우려하는 그런 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항소심(2심)에서의 논리는 무엇이었나.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군 입대를 하려다가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 경위, 항간에 떠도는 루머에 대한 해명을 영상으로 15분 간 촬영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직접 재판에 갈 수 없어 한계가 있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특히 군대를 안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선 10여 년 전 기자들에게 의도적으로 한 말이 아닌 첫 보도('군대 가겠다')가 과장돼 보도된 점임을 밝혔다. 물론 이는 나중에 오보로 판정됐다. 또한 군대를 갈지 고민을 적극적으로 했었고 추후 부모님의 설득으로 군대를 안 가게 된 것이란 해명도 영상에 담았다."
2심(23일)에 패소할 경우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도 있나.
"아직 깊이 생각한 적 없다. 지난 10여 년 간 난 단 한번도 무언가를 ‘계획’하고 진행한 적이 없다. 2015년의 인터넷 생방송도 오랜 기간 참다가 마음 먹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진심이 (대중에) 전달되지 않더라. 오히려 진심이 전달되기보다는 이슈와 루머가 그때그때 떠올랐다. 사실 지난 15년 간 해외에 있으면서 '소송을 안 하면 다른 길이 없다'며 국가에 대한 소송을 권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상대는 국가이고 난 개인이다. 난 (국가로 상대로 무언가를 하면) 안된다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으면 영원히 (입국이) 안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내 문제를 신경 안 쓰겠단 생각도 들었다. 계속되는 루머, 오해만 무성해서 너무 가슴 아프게 지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옛 모습을 기억하나.
"둘째 아들은 내 옛 모습을 곧잘 따라한다. 첫째가 점잖고 둘째는 까불이다. 이모들이 자꾸 ‘나나나’(2집 타이틀곡)를 하라고 하면 (노래나 춤을) 따라 한다. 사실 아내도 내 콘서트나 활동을 본 적이 없지만 가끔 옛 장면이 나올 때면 아이들에게 '아빠 되게 유명했던 사람'이라고 치켜세워주더라. 또 기본적으로 우리 가족은 한국 미디어를 접하지 않는다. 집에 TV도 안 뒀다. 인터넷도 다들 잘 안 한다. 오히려 국제학교를 다니다보니 내 중국 활동에 관심이 많다. 내가 재키 첸(성룡)과 일을 많이 하니까 친구들이 재키 첸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한다더라. 그럼 내가 '한국에선 내가 재키 첸보다 유명했다'고 말한다.(웃음)"
병무청의 입국 금지 조치(2002년) 이후 15년이 지나서야 적극적인 귀국 추진에 납득하지 못하겠단 사람들 반응도 있다.
"1심 패소를 할 때가 지난해 10월이었는데 그때 내가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다. 4층 높이의 화물선에서 보트 위로 뛰어내리는 장면이었다. 스턴트를 내가 직접 하려고 뛰어내렸는데 와이어가 끊어져 바다에 떨어졌다. 리허설이었고 바다 위에 떨어져 망정이었지 보트 위였으면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말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패소했다“고. 그런데 오히려 담담하게 느껴지더라. 죽다 살아나 그런가. '체념하자. 아직 난 살아있으니깐'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송을) 그만둘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변호사가 끝까지 해 볼만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 항소한 것이다. 15년 간 충분히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2002년 시민권 취득 당시 한국에 돌아올 때 해명 기회도 없이 공항에서 쫓겨났다. 입국 금지 사유가 '사회에 악영향을 준 인물'이라더라. 정치범, 테러범, 아동 성추행범처럼 간주된 것이다. 나름대로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한때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입국도 못하고 미디어(언론)에서 갖은 모욕을 다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떤 모욕이었나.
"기자들이 공항에서 여권 들어보라고 하고 사진을 찍더라. 심문하듯이 묻더니 (취재) 끝나고 욕하더니 신기하다며 사인까지 받아갔다. 미국 돌아가는 길에 마음 많이 상했다."
가장 큰 상처는.
"한 개그맨이 나를 풍자했었다. 여장을 하고 나온 채로 미국으로 도망간 계집애로 나를 표현했다. 어느새 나는 ‘도망간 사람’이 됐다. 그렇지만 난 도망간 것이 아니라 '(한국에)못 들어간 것'이다. 내가 잘했다는게 아니다. 솔직히 내 맘 누가 알겠나. 이젠 기대도 안 한다. 가족도 내 마음 모를 것이다."
왜 10여 년이 지나서야 소송인가.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기회만 되면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전하고자 했다. 그런데 항상 인터넷 기사 말미에는 '유승준 한국 컴백한다'는 식이었다. 난 한국 국적 회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국이 그리운 것이다. 2015년 아프리카 인터넷 방송 한 이후에는 욕설 논란이 있었고, 세금 회피, 병역 혜택 등의 루머만 무성했다. 이런 일 때문에 '시기가 안 좋다', '왜 이제 와서야'란 얘기만 계속 나왔다."
미국에 세금 납부를 회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을 시도한다는 설도 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한국 국적 회복하길 원한다'고 말한 적 없다. 한국인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다. (그 의혹은) 내가 군 복무를 할 나이가 지나니 오히려 악용되고 있다. 세금 납부 성실히 잘하고 있다."
그간 한국의 여론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나.
"날 기억해주는 분들이 있어 감사하다. (인터넷을 보면) 지금 잘 나가는 가수와 나를 항상 비교하더라. 그게 참 고맙다. 비·싸이와 특히 비교를 해줬다. 물론 누가 더 우월하냐의 비교는 아닐 것이다. 다만 ‘유승준이 아직 있었다면’이란 수식어를 붙여주는 게 고마웠다. 비가 나보다 키는 크지만 내가 더 잘 생겼다는 점도? (웃음) 비나 싸이를 보면 자랑스럽고 부럽다고 얘길 한다.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부를 때는 '중요하고 대단한 위치이니 힘들더라도 세계에 한국 알리는 연예인이 되라'는 응원을 했다. 비에게는 '난 비록 안 됐지만 넌 꿈을 다 이룬 사람이라 부럽다'고 했다. 나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내 상황을) 이해를 잘 해주시고 예전과는 (여론이) 다르다."
북미에서도 간간이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해외에서 마주치는 한국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캐나다로 이민간 개그맨 이성미 선배님의 제안으로 캐나다에서 한인 대상 콘서트를 열었다. 한국에 돌아가진 못하지만 해외 한인 청소년들에게만큼은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다. 미국·캐나다·브라질의 한인 교회에서 공연을 했다. 그러면서 유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한국에 힘과 도움이 돼달라'고 덕담을 했다. 재판부에서 생각하는 ‘안 좋은 영향 주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모든 게 가능했겠나. 콘서트 등으로 미국 전역 20여 군데를 돌아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은.
"지난 12월 하와이 가족 여행 때 일이다. 70대 한국인 할머니가 '유승준씨' 이러고 알아보더라. 내가 먼저 눈물이 나 고개를 숙였다.(흐느낌) 그러더니 '내가 미안해. 마음 아파하지 말고 힘내. 어른을 대표해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자식 같고 힘들어했을 테니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미국 등 해외에선 이민자로 시민권 따는 건 당연한 절차다. 오히려 한국에 못 돌아가는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한국 팬들의 반응은 어떤가.
"나를 사랑해주거나 응원해주는 팬들은 (병역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깊이 신경 안 쓴다. 내 입장에서 생각도 많이 해준다. 군 입대를 하려고 했던 진심만큼은 다들 믿어준다. 매년 중국에서 팬들과 만남을 가진다. 크리스마스, 설날, 그리고 내 생일인 밸런타인데이 때 말이다. 데뷔 기념일(4월1일) 때는 자기들이 콘서트장을 빌려서 공연도 열어줬다. 얼마 전에는 팬레터를 몇 박스씩 보냈다. 내 데뷔일마다 매년 중국으로 (최대) 50~60명씩 응원을 와줬다. 자기들끼리 호텔도 빌리더라."
유승준씨와 활동 시기가 겹치는 ‘1세대 아이돌’ 젝스키스 등이 최근 컴백하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내가 연예계나 오랫동안 떠나있다 보니 그 사실은 모르겠다.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진다."
한국에서의 활동(1997~2002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98년도 2집 수록곡 ‘나나나’ 활동 당시다. MBC 홀에서 주말 음악방송을 마치고 전라도 광주의 엠넷 무대로 가야 했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비행기편도 없는데 소속사에서 오토바이를 준비해줬다. 나와 SES·디바도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강 고수부지로 이동해 모터보트를 탔다. 그리고 다시 잠실 헬리콥터 선착장으로 움직여 헬리콥터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 마치 007 작전 같았다. 무대복도 입은 채였다. SES 멤버들은 피곤해서인지 흔들리는 헬기 안에서도 잘 자더라.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바쁘게 살았던 기억이다. 화려한 모습보단 바쁘게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밥 한 줄 먹었던 기억이 더 많이 난다."
귀국한다면 ‘가수 유승준’으로 부르고 싶은 첫 노래는.
"연예 활동을 하고자 들어가는 건 아니다. 생각 안 해봤고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모른다."
질문을 바꿔보겠다. 본인 노래 중에 어떤 노래가 가장 기억에 남나.
"2집의 ‘나나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팬들은 과격한 노래를 선호했지만 난 항상 마음에 있는 얘길 했다. 꿈과 희망을 노래했다. ‘나나나’를 보면 ‘언제나 힘들고 지칠 때 날 일으켜주던 그런 노랠 불렀다’는 가사가 나온다. 난 음악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았다. ‘비전’(4집), ‘찾길바래’(5집)도 희망을 부르는 노래였다."
현재 연락하고 지내는 국내외 연예인이 있나.
"가수 김종국씨와 친한다. 연락을 주고 받는 유일한 친구다. 3~4개월에 한번씩 한다. 중국에 올 때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김종국이 출연하는 ‘런닝맨’(SBS)은 한번도 못 봤다.(웃음)"
두 아들도 아버지처럼 가수를 꿈꾸나.
"아직 어리니깐 자기들이 하고 싶은 거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애들이 언어만큼은 잘 하더라. 모국어(한국어), 영어, 중국어다. 첫째는 수영도 잘 한다."
앞으로 계획은.
"연초에는 영화 마무리 하고 당분간 쉴 것이다. 이번 여름에 영화 제작을 준비한다. 스파이물이 될 것이다. 영화 제목이 나온 것은 아니다. 헬스 사업도 중국에서 준비하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국에 돌아가진 못해도 한국은 내 조국이고 자랑거리다. 한국이 그립다."

변호인단과 일문일답

▶재판에서의 주된 법적 논리는
"1심과 같다. 현재 유승준의 상황이 과연 비자 발급을 안 해줄 ‘상황’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비례의 원칙,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병역 기피 건으로 입국이 어려운 사람은 지금 유승준 한 명이다. 과거엔 분위기가 안 좋았겠지만 현재까지 유승준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게 과연 타당한가."

▶대법원에서 패소하면 이후의 계획은 어찌 되나.
"이번 소송 건은 기존 비자 신청에 대한 패소 건으로 추후 또 다른 비자 신청을 시도해볼 수 있다. 물론 (소송에 지친) 유승준 본인이 포기할 수도 있다."

▶만약 2심에 승소한다면 이후의 절차는.
"승소 시 비자 신청 자체는 가능해진다. 다만 LA영사관이 비자 발급에 있어 다른 연기 사유를 댈 여지도 충분히 있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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