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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로 구상나무 고사 원인 밝혀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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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구상나무 숲. 지리산 제석봉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건강한 구상나무 숲. 지리산 제석봉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한라산·덕유산 등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소나무(科)의 한국 고유종 구상나무.

국립공원공단, 나무 뚫어 나이테 분석
나이테 연대기 작성해 기상조건과 비교
갑자기 죽은 것은 태풍 탓에 쓰러진 것
서서히 죽은 것은 봄 가뭄 탓일 가능성

이 나무에는 '살아 100년, 죽어 100년'이란 말이 늘 따라붙는다. 죽어 1000년을 간다는 주목에는 못 미치지만 말라죽은 뒤에도 고사목으로 긴 세월을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지리산 등지에서는 이 구상나무가 말라죽는 사례가 확산하면서 멸종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단 지구온난화 등이 구상나무 고사의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미 말라죽은 구상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해보면 태풍 때문에 갑작스럽게 쓰러져 죽은 것인지, 아니면 환경변화에 의해 서서히 말라죽은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건강한 구상나무 숲. 지리산 세석평전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건강한 구상나무 숲. 지리산 세석평전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구상나무 집단 고사지역. 지리산 반야봉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구상나무 집단 고사지역. 지리산 반야봉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태풍으로 쓰러진 구상나무. 지리산 반야봉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태풍으로 쓰러진 구상나무. 지리산 반야봉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국립공원연구원은 구상나무의 생존 조건과 고사 원인 등을 파악하기 위해 2015년부터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 구상나무 82그루를 골라 나이테를 분석했다고 5일 밝혔다.

이들 나무는 대략 150년 전인 1864년 이후에 어느 시기에 태어나 자라고 죽은 것들이다. 연구팀은 죽은 구상나무에서 나이테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 사람 가슴 높이에서 지름 4.8㎜의 생장추(increment borer)로 구멍을 뚫었다. 땅을 시추해서 토양이나 퇴적토 시료를 채취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구상나무 나이테 시료 채취 모습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구상나무 나이테 시료 채취 모습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무 나이테 시료를 채취하는 장비인 생장추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무 나이테 시료를 채취하는 장비인 생장추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이테는 나무에게 있어 '블랙박스'와 마찬가지다. 항공기의 블랙박스가 항공 운항 기록을 모두 담고 있듯이 나이테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나무의 생육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생성되는 나이테 사이의 간격이 넓으면 그 해에는 생육이 잘 됐음을, 폭이 좁으면 생육이 나빴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구팀은 태어나고 죽은 시기가 서로 다른 여러 나무의 나이테를 나란히 놓고 겹치는 부분을 기준으로 서로의 나이테를 '가상의 나이테'로 잇는 '크로스데이팅(cross-dating)' 과정을 진행했다. 해당 지역의 장기간 생육조건 변화를 파악, '나이테 폭 연대기'를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구상나무 외에도 소나무 등 지리산에 서식하는 나무들의 나이테 폭 연대기가 작성됐다.

나이테 시료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이테 시료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이테 폭 연대기를 작성하기 위해 여러 나무의 나이테를 비교하는 `크로스데이팅` 과정. 나이테 간격을 바탕으로 장기간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이테 폭 연대기를 작성하기 위해 여러 나무의 나이테를 비교하는 `크로스데이팅` 과정. 나이테 간격을 바탕으로 장기간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이테 시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나이테 폭 연대기`. 가로축은 시간(연도), 세로축은 해당 연도의 나이테 간격. 나이테 간격이 넓으면 생육이 활발한 것이고, 간격이 좁으면 생육이 나빴음을 의미한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나이테 시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나이테 폭 연대기`. 가로축은 시간(연도), 세로축은 해당 연도의 나이테 간격. 나이테 간격이 넓으면 생육이 활발한 것이고, 간격이 좁으면 생육이 나빴음을 의미한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여러 수종의 나이테 폭 연대기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여러 수종의 나이테 폭 연대기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연구팀은 다시 건강한 나무와 말라죽은 구상나무의 나이테 폭 연대기를 비교했다. 어떤 나무는 말라죽기 훨씬 전부터 건강한 나무에 비해 생육이 저하됐고 마침내 생육이 중단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어떤 나무는 건강한 나무와 별 차이 없이 생장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생육을 중단된 경우도 있었다. 오래전부터 서서히 생육이 중단된 나무는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지만 환경의 변화를 견디지 못한 탓으로 추정됐고, 갑자기 죽은 나무는 태풍 등 강한 힘에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부러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건강한 나무(붉은색)와 서서히 말라죽은 구상나무(파란색)의 나이테 연대기 비교. 말라죽기 오래전부터 생육이 저하됐음을 보여준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건강한 나무(붉은색)와 서서히 말라죽은 구상나무(파란색)의 나이테 연대기 비교. 말라죽기 오래전부터 생육이 저하됐음을 보여준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건강한 나무(붉은색)와 쓰러져 죽은 구상나무(파란색)의 나이테 연대기 비교. 건강한 나무와 별 차이 없이 생육하다가 갑자기 죽었음을 보여준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건강한 나무(붉은색)와 쓰러져 죽은 구상나무(파란색)의 나이테 연대기 비교. 건강한 나무와 별 차이 없이 생육하다가 갑자기 죽었음을 보여준다.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원 측은 죽은 구상나무의 나이테 정보를 기상청 자료와 비교 분석한 결과, 겨울철 뿌리 보온과 봄철의 수분 환경이 구상나무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겨울철 눈은 구상나무의 뿌리가 얼지 않도록 보온 역할을 하며, 봄철에 천천히 녹으면 수분 공급 역할도 한다. 생육을 시작하는 봄철의 강수량은 나무 뿌리의 활성화 정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공원연구원 박홍철 책임연구원은 "장기간에 서서히 죽는 유형은 겨울철에 눈이 적게 내리거나 기온이 높아져 눈이 빨리 녹고 봄철에 가뭄이 심할 경우 극심한 물부족 현상을 겪게 된다"며 "이런 현상이 장기간 지속하면 구상나무가 죽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나공주 공원연구원장은 "현재까지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구상나무 집단 고사 지역인 지리산 반야봉 일대의 고사목에 대해 추가 정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미세 기상 관측 시스템도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기온변화나 눈 덮임과 수분 공급 등이 구상나무의 생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나무로 한라산·지리산·덕유산 등의 높은 산에서 살아가는 상록교목으로 키가 20m까지 자란다. 구상나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멸종위기 생물종 목록(Red List)에 '위기종(Endangered)'으로 등재돼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전나무(Korean Fir)로 불리며 가장 멋진 크리스마스 트리 수종으로 각광받고 있기도 하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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