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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친이-친박, 친박-비박 프레임 수명 다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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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박근혜 탄핵으로 위기 몰린 보수 정치

친이계·친박계 ‘화합 오찬’

2007년 8월 한나라당 경선. 친이계·친박계 ‘화합 오찬’

2007년 8월 치러졌던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선 후보 경선은 유난히 치열했다. 당시 이명박·박근혜 후보가 박빙의 싸움을 벌이면서 양측에 남은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경선 후 강재섭 당시 대표는 친박계와 친이계의 화합을 도모하겠다며 ‘폭탄주 회동’을 주선했다. 17대 국회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양측의 9명이 주인공. 친박 측에서 유승민·이혜훈·최경환 의원과 김재원·곽성문 전 의원, 친이 측에서 주호영 의원과 박형준·정두언·진수희 전 의원이 나왔다. 회동의 목적은 ‘화해’였지만 술잔이 돌자 앙금이 남은 양측은 “다음에는 누가 망나니 역할을 할 거냐” “살생부에 올라 있는 5인방만 초대한 거냐”와 같은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고 한다.

<b>지난 10년간 보수정당 흐름도<b>

지난 10년간 보수정당 흐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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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다툼까지 벌이며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웠던 이들은 1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됐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과거는 무색해졌다. 지난해 4월 총선 때 이른바 ‘진박’ 논란을 겪으면서 최 의원과 유·이 의원은 한때 동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네거티브 남매’로 불렸던 유·이 의원만이 여전히 돈독하다. 곽 전 의원(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이명박 캠프에 있던 4명도 뿔뿔이 흩어지기는 마찬가지. 친이계 주 의원은 친박계였던 유·이 의원과 함께 새누리당에서 분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하는 주역이 됐고, 친이계 정 전 의원은 바른정당 대선 경선에 출마할 남경필 경기도지사 캠프의 총괄본부장이 됐다. 2007년 경선에서 유 의원과 치열한 설전을 벌였던 친이계 진 전 의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유 의원 캠프의 총괄 역할을 맡게 됐다. 정 전 의원을 도와 이명박 캠프에서 전략기획을 맡았던 이태규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해 4월 총선 때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도와 국민의당이 원내 제3당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자유선진당 18대 총선 당선자들

자유선진당 18대 총선 당선자들

이들의 이합집산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보수정치를 규정했던 프레임이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는 걸 방증한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전후로 생겨난 친박계-친이계 프레임은 친박계-비박계 프레임으로 변천하며 지난 10년 동안 ‘당신은 보수정당의 누구인가’를 규정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보수를 구분하는 이 같은 틀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전문가뿐 아니라 보수진영의 현역 의원들조차 “이념이나 가치가 아닌 사람을 좇는 행태를 보이다 지금의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이합집산하는 보수진영
최경환·이혜훈은 동지에서 적으로
유승민·진수희는 적에서 동반자로

보수 정당 변화해야 살아남아
부유·특권층 대변하는 영국 보수당
개혁 받아들여 200년간 명맥 유지

이념보다 특정 인물에 의존
‘큰 소나무’ 탓 새싹 자라기 힘들어
“외부에서 새 인물 적극 수혈해야”

한때 보수진영의 대선 후보로 각광받았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일 대선가도에서 갑자기 이탈한 것 역시 결국 우리 정치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드러냈다는 분석도 있다. 이미 흘러간 옛 노래인 특정 정치인을 좇는 정치 행태를 반복하려다 반 전 총장으로부터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이야기냐”는 핀잔을 들었다는 것이다.

친박·무소속연대 의원들

친박·무소속연대 의원들

보수정당이 집권한 1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적폐는 결국 스스로를 폐족(廢族)의 위기에 몰리게 만들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구심점 역할을 지속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제도권 정치에서 강제로 이탈할 가능성이 커지자 보수진영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현실화 가능성이 커진 조기 대선에서 보수진영의 잠재적 후보들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을 전부 합해도 20%를 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2년 12월 대선

2012년 12월 대선

친노무현계에 사용했던 폐족이란 말도 10년 만에 좁게는 친박계, 넓게는 보수진영 전체에 쓰이고 있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크게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많던 친박계 중 박 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총대를 메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해선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제일 늦게 아는 게 부인 아니냐”며 ‘몰랐으니 죄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로 구성된 지도부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보수정치가 국민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가치가 실종된 것도 문제지만 참회가 실종됐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2007년 정권을 빼앗긴 뒤 친노에선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같은 사람이 스스로 폐족 선언을 했다”며 “하지만 지금 보수진영에서 그런 참회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정치컨설팅업체 민의 박성민 대표는 “진보에 비해 보수가 부패했어도 더 유능하다는 믿음이 국민에게 있었는데 지금 보면 경제나 안보 모두 보수가 더 잘한다는 신뢰를 주기 어렵지 않으냐”고 지적했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보수진영에서 패권주의에 대한 청산이 없다면 계파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이념이나 가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모이는 행태도 반복될 것”이라며 “그러면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바른정당 중앙당 창당대회

바른정당 중앙당 창당대회

본지가 지난달 31일과 1일 실시한 설 민심 여론조사에선 진보진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연령별로 봤을 때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높았던 60대 이상의 투표 의향이 가장 낮았고, 지역별로도 대구·경북(TK)의 투표 의향이 제주도를 제외하고 가장 낮게 나타났다. 보수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60대 이상과 TK 지역 유권자가 현재로선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 어떤 정치적 사건이 있을지, 어떤 구도로 대선 후보들이 경쟁하는지에 따라 보수진영의 승리 가능성을 닫을 필요가 없다는 전문가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당장의 대선이 아닌 더 먼 미래를 보고 준비하는 보다 근본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황교안·새누리당 지도부 만찬

황교안·새누리당 지도부 만찬

전문가들은 “보수의 재건은 수구(守舊)와 보수(保守)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지난달 펴낸 저서 『정당의 생명력』에서 영국의 보수당이 20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해 “보수주의는 무조건 변화에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혁명이라는 과격한 변화를 사전 예방하기 위해 사회제도의 개혁이 때때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적었다. 보수진영이나 보수정당이 부유층 등 특권층만을 옹호하는 집단으로만 비치는 상황에서 탈피해 개혁적 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사당화(私黨化)라는 표현이 공공연하게 쓰일 정도로 특정 인물에게만 기대는 행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한국의 보수진영은 ‘소나무 아래의 토양’에 비유된다. 소나무는 자기 근처에서 다른 식물이 자라기 어렵게 분비물을 내뿜는 타감작용(他感作用·allelopathy)을 통해 장수를 한다. 한국 보수가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 선거에서 자주 이기고 정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큰 소나무’ 같은 유력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그런 현상이 지금과 같이 걸출한 후보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여권 인사는 “그동안 보수진영은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이 있었고 그들의 개인기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앞으로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분 있는 정치인’이 나올 환경은 아닌 것 같다”며 “보수도 진보진영처럼 지향점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시민사회와의 쌍방향 소통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종빈 교수는 “보수진영도 적극적으로 외부에서 새 인물을 영입해 수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객토(客土)를 통해 새 인물이 등장하고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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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BOX] 나카소네 “진정한 보수는 원칙 지키며 끊임없이 개혁”

보수(保守)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의 정의(定義)에는 ‘보전하여 지킴’ 또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과 같이 ‘지키는 것’에 무게가 있다. 한국의 일부 보수 중에는 ‘지키는 것’의 대상을 가치가 아닌 특정 정치인으로 삼기도 한다.

애초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개념이 서구에서 시작된 만큼 20세기 영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학자 로저 스크러턴의 정의를 빌리면 이렇다.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잘 지켜 후대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신념 ▶약자를 보호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연대의식 ▶스스로 세운 원칙을 어기지 않는 강한 의지. 지난해 12월 27일 새누리당을 “가짜 보수”라고 비판하며 분당을 선언한 바른정당의 설명도 비슷하다. ▶훌륭한 전통과 유산을 계승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침 ▶사적인 이익 추구보다는 공적인 대의를 존중함 ▶개혁하고 변화하면서 국민의 일상을 지킴. 일본 자민당의 원로이자 보수 정계의 거물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보수의 유언』에서 “진정한 보수는 원칙을 지키며 끊임없이 개혁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보수는 단순히 지키는 데 머물기보다 ‘어떤 것을, 제대로 지키느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보수당이 정당 명멸사 속에서도 200년 가까이 당명을 유지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부터 마거릿 대처, 데이비드 캐머런 등으로 이어지기까지 시대가 요구한 변화와 개혁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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