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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그레타 거윅은 언제부터 그렇게 사랑스러웠나?

중앙일보

입력

175㎝에 달하는 키, 건장한 체구의 서른세 살 뉴요커가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저체중의 새침데기 스타들이 장악한 할리우드에서 그는 새로운 미(美)의 기준을 세웠다. 우디 앨런식 ‘뉴욕 로맨틱 코미디’의 후계자라 평가받는 배우이자 작가 그레타 거윅 얘기다. 연인 노아 바움백 감독과 공동 각본과 주연을 겸한 출세작 ‘프란시스 하’(2012)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부터 여성 감독 레베카 밀러와 손잡은 신작 ‘매기스 플랜’(1월 25일 개봉)까지, ‘그레타 거윅’이란 이름을 하나의 장르로 승화시킨 비결을 파헤쳤다. ‘프란시스 하’로 혜성처럼 등장한 줄 알았던 그는, 알고 보니 미국에선 10년 전부터 주목받아 온 ‘인디영화계의 연인(Indie Darling)’이었다.

매기스 플랜

자연스레 사람을 끄는 천진함과 씩씩함 그리고 언제든 유머를 잃지 않는 낙천성. 거윅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매력은 이렇게 요약된다. ‘매기스 플랜’ 같은 불륜 소재 드라마에서조차 그 매력은 그대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주인공 매기(그레타 거윅)는 세간이 정한 관습 따위는 신경 쓰지 않지만,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아가려 한다. 정자 기증을 받아 ‘싱글맘’이 되려다, 성공한 부인(줄리앤 무어)에게 기죽어 살던 유부남 교수 존(에단 호크)과 눈이 맞아 결혼한 매기. 결혼 후 남편과 전처의 아이들까지 억척스레 챙기던 그는, 가족을 나 몰라라 하는 남편에게 지쳐 ‘반품’ 작전에 나선다. 존을 잊지 못한 전처와 짜고서 말이다. 매기는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지만, 그가 애쓸수록 계획은 자꾸 꼬여 간다. 이 ‘막장’ 같은 상황에 관객은 빠져들고 만다. 특이하게도 퀘이커교도(‘내면의 빛’을 받아 구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성령을 중시하는 청교도 종파)인 데다, 셀프 인공 수정을 하느라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불사하는 매기가 하도 웃기고 짠해, 어느덧 그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프란시스 하'부터'매기스 플랜'까지

바움백 감독과 만난 첫 작품 ‘그린버그’(2010)에서 조금은 ‘쉬워’ 보이지만 누구보다 속 깊은 가정부 플로렌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허세 가득한 뉴요커 브룩 등 그가 연기해 온 캐릭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는 거윅 자신의 매력이 배어난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주연한 코미디영화 ‘20세기 여인들’로 올해 제7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른 마이크 밀스 감독의 증언을 들어 보자. “실제로도 그레타(거윅)는 투명할 정도로 솔직하다. 그가 느끼는 것은 모두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연기도 연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배어난 감정처럼 피부로 와 닿는다.” “평범한 삶이 주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거윅의 로맨틱한 시선”(바움백 감독)은, 댄서로서 자질 부족에 좌절했던 거윅의 자전적 성장영화 ‘프란시스 하’에 고스란히 담겼다. 직접 각본·연출을 맡지 않더라도 “캐릭터와 완전히 물아일체가 돼 작품에 몰입하는 것”이 거윅의 작업 방식.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 가장 순도 높은 자양분이 되는 건, 그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지금의 ‘그레타 거윅’에 이르렀을까. 좌절과 실패 사이를 넘나드는 핀볼처럼 지금의 커리어를 만들어 온 그는 자신이 “거의 닫힌 (기회의) 문틈으로 뛰어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다. “삶은 혼란스럽지만, 어쨌거나 굴러간다”며 혹독했던 시절을 웃어넘기는 구김살 없는 영혼. 지금까지 그의 삶엔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힙합에 눈뜬 발레 소녀

방황하는 소녀들

방황하는 소녀들

거윅은 미국 새크라멘토의 간호사 어머니와 재무 컨설턴트이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아버지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큰 키와 완고해 보이는 턱 골격, 종종 음 이탈하는 중저음 목소리는 아일랜드와 독일·영국 혈통의 양친이 물려준 것.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성향은 어머니를 빼닮았다. 열두 살 때까지 “발레밖에 모르는 진지한 소녀였다”는 거윅. 그러나 그의 체격은 여느 가냘픈 고전 무용수들과는 다르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좌절한 그를 발레 학원에서 끌어냈다. “내 딸이 하루 세 시간씩 연습실 거울을 보며 한탄하게 놔둘 순 없어!”라면서. 발레를 그만두고 현대 무용을 배우고, 힙합 그룹에 들어가면서 거윅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대부분의 멤버가 아프리카계나 라틴계인 힙합 그룹에서, 그는 단 둘뿐인 백인 소녀 중 하나였다. “난 친구들을 따라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하고, 헐렁한 옷을 걸쳤다. 그 시절은 내게 춤과 아름다움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줬다. 갈대처럼 마르거나 백합같이 청초할 필요 없는,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거윅의 말이다.

우디 앨런·뉴욕·인디영화

친구와 연인사이

친구와 연인사이

앨런의 영화를 동경하던 거윅은 미국 뉴욕 버나드대에 진학해 영어와 철학을 전공했다. 작가를 꿈꾸며 즉흥극 그룹에서 활동했고, 콜럼비아대의 유서 깊은 뮤지컬 동아리 ‘바시티’ 쇼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극작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그는 모든 학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인생 두 번째 실의에 빠진다. 그때 친구인 무명 감독 조 스완버그가 자신의 ‘무(無)예산’ 영화에 참여해 줄 배우들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거윅. 그가 출연한 첫 영화가 바로 컴퓨터에 빠진 지질한 남자의 이야기 ‘LOL’(2006)이다. 당시 유행하던 멈블코어(Mumblecore·무명 배우 출연과 반 즉흥적인 대화가 특징인 초저예산 인디영화) 장르에 충실한 이 재기발랄한 영화는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100%에 달하는 극찬을 받았다. 이후 거윅은 작가이자 배우로서 재능을 살려 여러 멈블코어 영화를 작업했고, 원거리 커플을 다룬 ‘밤과 주말’(2008)에선 스완버그 감독과 공동 각본·연출·주연하기에 이른다.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프란시스 하’가 선사한 행운

20세기 여인들

20세기 여인들

멈블코어 스타 제이·마크 듀플래스 형제 감독의 코미디 ‘백헤드’(2008), 남성우월주의에 맞서는 대학생을 연기한 코믹 성장담 ‘방황하는 소녀들’(2011, 윗 트닐먼 감독) 등에 출연하며 거윅은 인디영화계의 스타로 거듭났다(2014년 거윅이 상업적인 TV 시트콤의 작가 겸 주연으로 발탁되자, 그의 팬들은 “거윅이 변했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린버그’ 이후 그는 나탈리 포트먼·애쉬튼 커처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친구와 연인사이’(2011, 이반 라이트먼 감독) 등 할리우드 상업영화에도 출연했지만, 특색 없는 조연에 그쳤다. 당시 경험에 대해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주류’ 영화계의 문턱에서 방황하던 그를 붙들어 준 것은 바로 ‘프란시스 하’. 뉴욕 거리를 춤추듯 질주하는 그의 생기 넘치는 모습은, 그해 유수 영화제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바움백 감독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도 이 영화를 만들면서다.

‘매기스 플랜’과 ‘재키’, 또 다른 도전들

재키

재키

최근 ‘매기스 플랜’과 ‘재키’(1월 25일 개봉, 파블로 라라인 감독), 두 편의 영화로 국내 영화 팬을 만난 거윅. ‘매기스 플랜’에선 줄리앤 무어·에단 호크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했고, ‘재키’에선 미국 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나탈리 포트먼)의 절친한 친구이자 비서 낸시 터커맨을 연기했다. 또한 그는 1970년대 미국에 불시착한 세 여성의 이야기 ‘20세기 여인들’과 4차원 캐릭터를 선보인 코미디 ‘위너독’(5월 개봉 예정, 토드 솔론즈 감독),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아일 오브 독스’(2018년 개봉 예정)로 다시 관객을 만날 채비 중이다. 그는 이어 자신의 고교 시절을 토대로 한 새크라멘토 소녀(시얼샤 로넌)의 성장담을 그린 ‘레이디 버드’로 첫 단독 연출에도 도전한다. “지난해 어느 영화상 시상식에서 배리 젠킨스(‘문라이트’(2월 22일 개봉)의 감독)와 오랜만에 만났다. 그와 나는 스물한 살 때부터 알았는데, 우리가 그런 화려한 자리에서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이 사랑스러운 행운아의 전성기는 이제 갓 막이 올랐다.

프란시스 하

프란시스 하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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