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한옥마을 만든 조선 건축왕 정세권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2017.02.03 01:16

업데이트 2017.02.0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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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경민 교수

김경민 교수

“선생은 도시계획의 선각자였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해방 이후 일반 대중에겐 잊혀진 인물이 됐지만, 역사적 족적이 워낙 거대해 하나하나 퍼즐 맞추듯 기록과 자료를 모을 수 있었지요.”

『…경성을 만들다』 펴낸 김경민 교수
일제 맞서 조선인 주거공간 지켜
사업으로 돈 벌어 민족운동 지원
경찰 끌려가 모진 고초, 재산 빼앗겨

김경민(46)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지난 5년 간 정세권이란 인물에 푹 빠져 그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이마)도 펴냈다. 김 교수가 ‘건축왕’으로 꼽은 정세권(1888∼1965)은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업자)다. 1920년대 익선동 166번지 개발을 시작으로 가회동·삼청동 일대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었고, 봉익동·성북동·혜화동·창신동·서대문·왕십리·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근대식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1930년대 정세권(왼쪽 앉은 이)의 가족 사진. [사진 이마]

1930년대 정세권(왼쪽 앉은 이)의 가족 사진. [사진 이마]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도시계획·부동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가 ‘정세권’에 매료된 것은 서울의 도시개발사를 연구하면서다. “관광명소가 된 ‘북촌 8경’ 등 서울 곳곳의 한옥집단지구를 누가 처음 개발했을까에 관심이 생겨 시작”한 연구였는데, “한국 근현대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한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됐다. “연구 과정 중 선생의 둘째 딸인 피아니스트 정정식(1921∼2015) 전 이화여대 교수 등 유족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도 들었다”고 했다.

1888년 경남 고성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정세권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했다. 그가 주목한 지역은 서울의 북촌, 즉 청계천 이북 지역이었다.

정세권이 개발한 서울 북촌 한옥마을. [사진 이마]

정세권이 개발한 서울 북촌 한옥마을. [사진 이마]

“1920년대는 일제가 계획적으로 북촌 진출을 시도하면서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을 위협했을 때입니다. 총독부를 북촌으로 이전하고, 총독부·경성부청 관사와 동양척식회사 직원 숙소 등을 인근에 지었죠. 선생이 북촌에 한옥지구를 개발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을 지켜낸 것입니다.”

김 교수는 “생전 선생이 ‘사람 수가 힘’이라며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강조했다는 말을 유족들에게 들었다”고 전했다.

정세권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20년대 부동산 시장에서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독보적인 1위 업체가 됐다. 한 해에 300여 채의 신규 한옥을 공급할 만큼 회사 규모가 컸다. 그렇게 쌓은 부를 민족 운동에 바쳤다. 특히 조선물산장려운동에 관심이 컸다. 한옥 사업 자체가 ‘조선물산장려’의 일환이기도 했다. 31년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자비로 건설했고, 30년대 중반부터는 조선어학회에도 참여했다.

“사업하는 사람이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정부와 등진다는 건 자살행위지요. 그런 면에서 선생의 민족 의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42년 정세권은 우리말사전 편찬을 트집잡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재산도 빼앗겼다. 이후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정세권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는 그를 ‘집장사’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한몫 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포디즘에 기초한 미국의 대규모 개발과 궤를 같이할 정도로 도시개발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또 “한옥집단지구의 주택은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전통 한옥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오스만 시장의 ‘파리 개조 사업’ 이후 서민 거주 지역이 완전히 파괴된 것과 비교해 매우 가치있는 업적”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선생에 대한 평가는 이제 시작”이라며 “1920∼30년대 한옥을 규격·표준화시켜 집단지구로 개발한 선생의 사례를 서구의 도시개발과 비교 연구해 국제 학계에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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