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치적 진보, 미학적 진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부장

양성희
문화부장

지난달 7일은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2주기였다.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가 엉덩이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풍자 만평에 격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 형제가 파리의 잡지사 사무실에 난입해 편집장 등 12명을 사살한 사건이었다. 2주기 추모식에는 지금도 활동하는 이 잡지사 만평가 3명이 참석해 숨진 동료들에게 꽃을 바쳤다. 샤를리 에브도는 테러 이후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는데, 종교·인종 등 성역 없는 ‘모두까기’ 정신은 변함없는 모양새다. 지난달 24일에는 많은 희생자를 낸 이탈리아 눈사태에 대한 만평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사람 목숨을 희화화 말라”는 이탈리아인들의 비난을 샀다. 지난해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이탈리아 지진 피해자를 파스타 면에 비유한 만평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1차원적 배설 정치풍자 본령 아니야
문화적 상상력에도 진보가 필요해

2년 전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과 타자·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볼테르의 말로 대변되는 표현의 자유에 제한론이 나온 셈이다. 물론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프랑스 68혁명의 후예답게 일체의 권위에 저항하는 샤를리 에브도가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제도권 종교의 근본주의를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의견과, 이들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가 프랑스 소수자인 무슬림을 향한 백인남성의 모욕 이라는 의견이 맞섰다.

이에 대한 속 시원한 정답은 없다.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 표현의 자유가 곧 혐오의 자유는 아니라는 데 의견은 모아졌지만, 그렇다면 혐오 표현에 대한 제한과 규제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 논란이 뜨겁다. 알려진 대로 박근혜 대통령이 나체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그린 ‘더러운 잠’이 그것이다. 작가는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의혹과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풍자했다고 하지만, 여성을 모욕 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발가벗기기를 택함으로써 인신공격·여성혐오 논란에 휘말렸다. 비너스 등 여신들의 다소곳한 누드 자리에 매춘부를, 그것도 당당하게 정면을 직시하는 포즈로 배치시켜 여성 누드의 정치성을 드러낸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했지만, 안이한 얼굴 바꿔넣기 이상의 파괴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동시에 “대통령 같은 주요한 공적 인물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무한대로 인정돼야 한다. 명예훼손? 공인에겐 명예가 없다”(박상익 우석대 교수)는 지적도 귀 기울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여혐’ 논란 못지않게 ‘미학적 후짐’이 이번 사태의 주된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간 진보 진영의 미술가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쏟아낸 각종 풍자그림들이 그렇다. ‘진보 미술가=반여성주의자 집단’은 아닐진대 한결같은 이미지다. 민망한 자세로 출산을 하고, 그것도 아버지를 낳고, 나체로 누워 있다. 직설적으로 상대를 모욕하고 깎아내리는 것, 그 배설과 가학의 1차원적 쾌감이 정치풍자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미안하지만 쌍팔년도식 미학이다.

그런 ‘미학적 후짐’으로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많은 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이 그림을 보고 불쾌하고 품격 없다고 느끼는 것도 이런 ‘미학적 후짐’에 대한 거부감 때문 아닐까. 역사와 정치에만 진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미학과 문화적 상상력에도 진보가 필요하다. “미학적 진보 없는 정치적 진보는 반대한다. 그것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정치적 진보와 미학적 진보가 함께 가야 한다.” 미술평론가 최범씨의 페이스북 글을 옮겨 본다.

오해 없길 바라며 덧붙이자면 ‘미학적 후짐’은 결코 고상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가령 수사를 받으러 가며 최순실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억울하다”고 울부짖을 때 현장의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세 차례 외친 “ㅇㅂ하네”는 전 국민에게 그 어떤 예술작품도 하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욕지기가 치미는 상황을 오직 욕설로 되받아칠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욕설의 미학’의 승리다. 개인적으로는 ‘더러운 잠’보다 수십 배의 ‘예술적’ 성취라고 생각한다.

양성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