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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반반 역사교과서’…양측 요구 다 들어주려다 논란 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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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영 교육부 차관이 3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을 공개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이영 교육부 차관이 3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을 공개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검정 역사교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 허용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이 공개됐다. 분량이 많다고 지적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은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민간에서 만들 검정 교과서의 집필기준에선 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대한민국 수립’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용어도 쓸 수 있게 했다. 학계와 정치권에선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발행 체제, 시기, 내용 등에서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고 어떤 부분은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이영 교육부 차관은 31일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과 검정교과서 집필 기준 공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 결과는 검정교과서 집필 기준의 일부 완화 또는 후퇴로 나타났다. 내년부터 중·고교에서 국정교과서와 함께 사용될 검정교과서에는 ‘대한민국 수립’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를 모두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정교과서 내용 가운데 가장 논란이 컸던 부분에 대해 교육부가 한발 물러선 셈이다. 하지만 학계와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국정교과서는 물론 검정 집필 기준에 대해 반발하고 있어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국정 최종본-검정 집필기준 공개
국정은‘1948년 대한민국 수립’고수
검정엔‘대한민국 정부 수립’허용
국정, 박정희 서술 9쪽 분량 그대로
제주 4·3사건, 위안부 서술은 강화

이날 공개된 최종본은 지난해 11월 28일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온라인에 올린 뒤 쏟아진 각계 의견 중 760건을 받아들여 수정·보완했다는 게 교육부 측 설명이다. ▶친일파의 친일 행적을 보다 자세히 설명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제주 4·3사건에 대한 서술도 강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표현은 유지했다.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반론이 많았지만 수용하지 않았다. 또 분량이 너무 많다고 지적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은 9쪽(고교 한국사)을 그대로 유지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 “관 주도의 의식개혁 운동으로 나아가면서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적 서술이 추가됐을 뿐이다. 진재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박 대통령 관련 내용은 검토 결과, 공과(功過)가 고르게 들어 있어 분량을 줄이기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국정교과서를 심의하고 수정하는 편찬심의위원 12명의 명단도 이날 발표됐다. 위원장을 맡은 이택휘 전 서울교대 총장을 비롯해 전문가 6명, 교원 4명, 학부모 2인이다. 전문가 가운데 이 위원장과 강규형 명지대 교수, 허동현 경희대 교수 등은 이른바 ‘뉴라이트’ 성향으로 평가받는 학자들이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최종본은 현장검토본에서 지적된 편향된 역사 인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탈자만 수정한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종전보다 퇴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은 “위안부에 대해 현장검토본에서 ‘성노예’라고 명확히 표현한 부분이 최종본에선 ‘사실상의 성노예’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위안부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도 최종본에선 더 모호한 사진으로 교체됐다”고 지적했다. 또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트학과 교수도 “현장검토본과 최종본은 본질적으로 전혀 달라지지 않은 ‘박근혜가 만든 박정희 교과서’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편찬심의위원에 대해서도 “예상대로 뉴라이트 일색으로 보수 학자들이 대부분”이라고 꼬집었다.

“검정교과서도 국정 복제품 될 것” 비판도

더 큰 논란거리는 내년부터 사용하게 될 검정교과서의 집필 기준이다. 교육부는 일부분을 제외하곤 국정교과서의 편찬 기준을 거의 그대로 재활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쓸 수 있도록 한 정도가 새로 눈에 띌 뿐이다. 이 때문에 검정교과서 집필진 구성과 집필 과정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을 거란 우려가 나온다. 진보 성향의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이날 “국정교과서 편찬 기준을 검정에도 그대로 적용해 유사품을 대량 복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며 “8종의 또 다른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정교과서를 출간해 온 한 출판사 관계자도 “출판사로서는 정부의 검정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기준을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국정교과서와 전체적인 흐름이나 용어는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정교과서의 집필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점도 우려를 더하고 있다. 교육부는 올 8월까지 출판사가 집필을 완료하면 검정 심사를 거쳐 연말에 교과서를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대로라면 출판사가 집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6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종전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시간이어서 국정교과서를 대폭 참고할 수밖에 없을 거란 추측도 나온다. 이 때문에 새 교과서 도입 시기를 늦추자는 의견도 나온다. 박중현(두산동아 교과서 집필) 잠일고 교사는 “지금 기준대로라면 국정교과서와 가장 닮은 검정교과서만 살아남을 것”이라며 “새 교과서 도입 시기를 내후년으로 미뤄 집필 기간을 확보하고 기준도 새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윤서·박형수·전민희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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