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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타협 아닌 극단에 있다”…떠난 지 10년, 오규원을 다시 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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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제자·문인 중심 추모행사 잇따라
유품전, 사진집 출간, 첫 시집 복간
애제자 이원 “익숙함을 질타하신 분”
시인 김언 “처음 읽고 빨려들어간 시”

세상 뜨기 열흘 전쯤 병상에서 제자 이원의 손바닥에 남겼다는 오규원 시인의 마지막 시

2일은 시인 오규원(1941∼2007)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죽기 열흘 전쯤 시인은 짧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2008년 유고시집 『두두』의 ‘시인의 말’이 된 시다. 그에 대한 추억은 사람마다 내용이 다를 것 같다. 그만큼 다채로운 얼굴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라는 구절을 품은 시 ‘한 잎의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서정시인일지 모르겠다.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커피를 800원에 파는 이상한 카페에 관한 시 ‘프란츠 카프카’에 놀란 사람에게는 모더니스트다. 『두두』 속의 오규원은 달관한 관찰자의 모습이다.

시인이 20년 가량 교편을 잡았던 서울예대 제자들에게는 10년이 지났건 또 10년이 흐르건 세상에 둘도 없는 스승이다. 주입식 권위주의가 아니라 제자들 각자의 개성을 살려주되 스스로 시쓰기 방법론을 깨우치도록 긴장감 있게 가르쳐서다. 복수의 제자들의 공통 증언이다. 그래서 10주기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최정례·황인숙·함민복·장석남·박형준·강영숙 등 제자 그룹에 김병익·황현산·이남호·김혜순·이광호 등 유력 평론가·시인들이 가세해 잇따라 추모 이벤트를 연다. 서울 서촌의 류가헌 갤러리에서 시인의 육필·유품·동영상 등을 전시하는 특별전(26일까지)이 열리고,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집 『무릉의 저녁』(눈빛)이 이미 출간됐다. 1971년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복간되고, 문학강좌와 시낭독회, 하반기에는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심포지엄도 열린다.

서울 남산의 드라마센터와 외교구락부, 인근 골목은 서울예대 남산 시절 오규원의 흔적이 밴 공간이다. 지난달 25일 오후 이원(49)·김언(44) 두 시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이원 시인은 애제자, 2009년 미당문학상을 받은 김언 시인은 지난해 초 오규원 연구로 명지대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이원(왼쪽)과 김언 시인이 25일 서울 남산 골목길을 찾았다. 스승 오규원 시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책 했던 곳이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시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를 쓰기도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원(왼쪽)과 김언 시인이 25일 서울 남산 골목길을 찾았다. 스승 오규원 시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책 했던 곳이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시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를 쓰기도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끊임 없는 변신

시인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두 10권의 시집을 냈다. 전집을 펼쳐 놓고 처음과 마지막을 비교하면 과연 같은 시인인지 의아할 정도다.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자 김언 시인은 ‘지는 해’를 꼽았다. 오규원이 특유의 ‘날이미지’ 시론을 천명한 후기 시세계의 첫 번째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1995)에 실린 작품이다.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 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여기까지가 대략 전반부인 시는 카메라 렌즈처럼 차갑고 정밀하게 풍경과 인물을 관찰할 뿐이다. 그게 어떻다는 건지 시인의 내적 감정이나 가치 판단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 관념이나 사변, 그것들에 오염된 언어까지, 모든 인간중심적인 요소를 철저히 지우려고 애쓴 ‘날이미지시’다. 그런데도 김언 시인은 “대학생 때 이 시를 처음 본 순간 쑥 빨려들어갔다”고 했다. “남의 시를 잘썼다고는 느껴도 웬만해서는 감동받기 쉽지 않은데 지금도 10번에 한 번 정도는 ‘후크’가 걸리는 시”라고도 했다.

이원 시인은 1987년 중기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실린 ‘버스 정거장에서’라고 밝혔다.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이렇게 이어지는 시는 시쓰기에 대한 일종의 ‘방법적 회의’라 할 만한 내용이다. 이원 시인은 “시를 쓰다 보면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의, 익숙한 생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경전처럼 꺼내 다시 읽는다”고 했다.

#예술가는 대중도 환호도 없는곳을 가야

시인에게는 누구나 나름의 시쓰기 방법론이 있다. 그런데 시론을 소박하게 품는 것과 그것을 품에서 꺼내 발표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나는 일이다. 오규원은 이론서 『날이미지와 시』, 창작법 연구서 『현대시작법』 등을 써서 자신의 시론을 과감하게 공론화했다. “이론(시론)과 실제(시쓰기)의 겸비, 좌뇌와 우뇌가 골고루 발달해야 가능한 일”(이원), “굉장한 배짱이 필요한 시쓰기 일반론에 대한 도전”(김언)이다. 무의미시를 추구한 김춘수, 비대상시를 내세운 이승훈 시인 정도가 했던 일이다.

덕분에 미학적 공격도 받았다. 날이미지시가 추구하는, 주관을 철저히 배제한 100% 객관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보여서다. 이원 시인은 “‘날이미지=주관 배제’라는 잣대를 절대화해 선생님의 시 작품조차 날이미지 시가 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했다. 김언 시인도 “시인의 시론은 하나의 시 쓰기 방향으로 봐야지, 과연 꼭 시론대로 썼는지, 그 방향이 맞다 혹은 틀리다의 정오 판정 대상이 되면 안 될 것 같다”고 밝혔다. 이런 미학적 논점들이 하반기 심포지엄에서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예술은 중도나 타협, 모범에 있지 않고 극단에 있다. 예술가는 대중도 환호도 독자도 없는 곳을 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적어도 시인이 그렇게 살았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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