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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북한도 마이카 시대?…SUV ‘뻐꾸기’ 몰면 일등 신랑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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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평양국제상품전람회에 선보인 삼흥자동차의 픽업트럭과 SUV.

평양국제상품전람회에 선보인 삼흥자동차의 픽업트럭과 SUV.

북한에서 자가용 승용차의 개인 명의 소유가 허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대북 소식통은 30일 “북한 당국이 지난해 말부터 승용차량에 한해 개인 이름으로 인민보안성 등 해당 기관에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며 “새로 구매하는 경우는 물론 공장·기업소 등 기관에 소속시켜야 했던 개인 승용차도 허용 대상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신흥 자본가를 일컫는 ‘돈주(錢主)’ 그룹을 중심으로 개인 차량 구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차 사면 기관에 소속시켜 오다가
작년 말부터 개인 명의 등록 허용
평양역엔 승용차 ‘휘파람’ 광고판
북 경제, 시장화 → 소유화 움직임

그동안 북한은 승용차 구매는 허용하면서도 개인 이름으로 등록해 사유재산화하는 건 인정치 않아 왔다. 자기 차를 기관에 등록하는 건 ‘노동당에 개인 재산을 바치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다. 북한 민법이 ‘개인소유권’을 인정하는 대표적 사례로 승용차를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물론 최고지도자인 김일성·김정일과 김정은이 인민배우나 공훈예술인·체육인 등에게 선물로 주는 경우는 예외였다. 1999년8월29일 스페인 세비야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정성옥은 “장군님(김정일)만 생각하고 뛰었다”는 찬양성 외신 인터뷰로 평양 귀환 뒤 고급 승용차를 받았다. 이처럼 자가용차는 북한 주민들에게 꿈과 같은 일로 여겨졌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1순위도 자동차다.

평양엔 택시 1000여 대…교통 체증도

북한에서 차량 개인 소유에 대한 욕구가 커진 건 90년대 말 장마당 경제가 본격화하면서다.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 잡은 돈주들은 평양과 지방 도시 간 유통망을 보다 발 빠르게 연결하려 차량을 운용했다. 노동당이나 기관에 버스·승합차를 등록해 두고 몰래 빼내 돈벌이를 하는 속칭 ‘써비차’가 크게 늘어난 것도 이 즈음이다. 대북부처 당국자는 “대중교통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평양~원산 코스를 운행해 주고 장마당 상인들로부터 수익을 챙겨 돈방석에 앉은 경우도 있다”며 “당 간부나 지방 관료 등도 급할 경우 이용한다”고 말했다.

남북 합작으로 98년 북한 남포에 설립된 평화자동차가 ‘휘파람’ 승용차를 생산하자 주민 관심은 더 높아졌다. 평양역 등에 자본주의식 광고판까지 등장했다. 1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도 부유층을 중심으로 인기몰이를 했다. 이곳에서 생산한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뻐꾸기’를 보유한 남성은 일등신랑감으로 꼽혔다. 재력은 물론 평양과 지방을 수시로 오갈 수 있는 권력까지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 거리에는 승용차가 부쩍 늘어났다. 집권 3년 차인 2014년께부터 평양 거리에 교통 체증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김정일 시기 80여 대에 불과했던 택시는 현재 1000여 대에 이른다. 신의주와 혜산 등 북·중 국경지역에선 중국산 중고차의 밀반입이 성행했다.

평양 고층 아파트엔 웃돈도 붙어

최근에는 평양과 지방도시 고층 아파트 투기 쪽으로 부유층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북한에 부동산 시장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며 “아파트 가격이 달러로 책정된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말했다. 2만 달러에서 최대 10만 달러까지 육박하는 매매가에도 불구하고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선(先)분양식 아파트 구매나 프리미엄(웃돈) 거래까지 성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2014년 5월 터진 평양 평천구역 23층 신축 아파트 붕괴 참사도 북한 당국이 재정 확보를 위해 무리하다 뒤탈이 난 것이란 얘기다.

북한 장마당 경제는 거침없는 기세로 확산 중이다. 이미 북한 당국 차원의 경제 규모를 넘어섰다는 진단도 나온다. 현인애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최근 ‘북한의 개인수공업 특징과 전망’이란 보고서에서 “아코디언(악기)의 경우 국가 생산 규모는 월 250여 개에 불과하지만 개인 수공업으로는 월 500~700여 개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영희 산업은행 북한경제팀장은 “2003년 이전 북한에는 소비재 시장만 존재했지만 지금은 생산재·금융·노동·부동산 시장까지 모두 5개의 시장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명의로 자동차 등록을 허용했다고 해서 북한에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고 단정하긴 무리다. 사유화나 개혁·개방과 관련해서는 고삐를 풀었다 다시 죄는 행보를 되풀이해 온 때문이다. 하지만 평양의 부유층과 시장경제 세력을 중심으로 욕구가 커진 건 분명하다. 북한 경제가 시장화의 수준을 넘어 ‘개인 소유화’로 치달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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