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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인당 1억5500만원짜리 미식 여행···성북동 골목에서 시작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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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포시즌스’가 선택한 한식 요리연구가 이종국

8년 묵은 석화젓, 어린 열무, 석이버섯
모임 특성 고려해 매번 다른 재료·메뉴
식사하다 벌떡 일어나 박수 친 손님도

1인분 50만원 한식 비싸다는 건 편견
우리 것 보여주고 싶어 유생 모자 고집
문학은 작품으로, 음식은 가슴에 남죠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 포시즌스 그룹은 오는 5월 출발하는 미식 여행 상품 ‘컬리너리 디스커버리’의 출발지를 서울로 정했다. 19일간 유럽·아시아 9개 도시에 있는 미쉐린(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돌며 최고 수준의 요리를 경험하는 1인당 1억5500만원 비용의 미식 여행이다. 그 시작점을 서울로 정했다는 건 그만큼 세계적으로 한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시즌스 본사가 직접 방한해 선택한 3개의 한식당 중 하나가 바로 이종국(57·사진) 요리연구가의 자택이자 연구실인 성북동 ‘음식발전소’다. 국내 정재계 인사들이 외국의 VIP 손님맞이를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 발표 ‘월드베스트 50’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노마(덴마크)’의 오너셰프 르네 레드제피 등 해외 유명 셰프들도 한국을 찾을 때면 꼭 들를 만큼 외국에도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그가 메뉴 개발에 참여했던 여의도 한식당 ‘곳간 by 이종국’이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별 2개를 받았다. 이종국의 한식’은 어떤 모습일까. 한해가 저무는 지난달 27일 음식발전소에서 그를 만났다.

성북동의 조용한 골목에 자리한 이종국씨의 자택이자 연구실 ‘음식발전소’엔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국내 정재계 인사가 초대한 외국의 VIP뿐 아니라 미국·영국·카자흐스탄의 장·차관들도 다녀갔다.

“요리를 담기에 앞서 철학과 이야기, 상대에 대한 배려를 담으라”는 이종국씨의 신념을 적은 메뉴판.

“요리를 담기에 앞서 철학과 이야기, 상대에 대한 배려를 담으라”는 이종국씨의 신념을 적은 메뉴판.

미술을 전공한 이씨는 제철을 맞아 신선하고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에 그만의 감성을 더해 ‘접시 위의 예술’을 구현한다. 뻔한 식재료 대신 ‘토종 허브’라 불리는 방앗잎 기름을 쓰고, 유기농으로 키운 미니 당근처럼 구하기 힘든 식재료도 자주 사용한다. 8년 묵은 석화젓과 잘 삭힌 동치미처럼 ‘시간의 맛’이 느껴지는 요리를 주로 내놓는 것도 그만의 차별화된 방법이다.

한국의 사계, 정(情) 등 주제에 따라 매번 다른 메뉴로 코스를 구성하지만 컨셉트는 동일하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국(또는 찌개), 직접 담근 김치 등을 담아내는 조선시대 ‘선비의 밥상’이다. 예부터 양반가의 음식은 제철 식재료를 중요히 여겼고 조리법과 상차림이 단아하고 정갈했기 때문이다. 먹는 이가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그의 요리를 맛본 사람들에게선 감탄이 이어진다. 모 그룹 회장은 그의 요리에 감동해 식사비용의 몇 배가 되는 돈을 팁으로 내놓았고, 또 다른 그룹 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는 일화가 있다.

음식발전소에서 식사를 하려면 열흘 전 예약은 필수다. 그는 한 달에 평균 3~4회로 식사회수를 제한하고 있다. 식사 때마다 참석자의 식성과 모임의 성격, 제철 식재료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새롭게 코스 메뉴를 짜려면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당일 나오는 코스를 안내하는 메뉴판도 아트 북 형태로 매번 새롭게 디자인한다.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을 고민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저녁 식사비용은 1인당 50만원으로 꽤 비싸지만 전화번호조차 공개하지 않는 이곳에 알음알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많다. 2014년 열린 웨스틴조선호텔 개관 100주년 기념 갈라 디너에서도 1인당 50만원이라는 높은 금액에도 불구하고 이틀 만에 전 좌석이 매진됐다.

-‘이종국의 음식은 너무 비싸다’고들 한다.
“몰라서 하는 얘기다. 난 한 번 진행한 코스는 ‘재탕’하지 않는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파인다이닝 아닌가. 매번 똑같은 음식을 내는 건 빵집에서 곰보빵 찍어내는 거랑 같다. 그리고 마음이 통한 사람, 내가 부르고 싶은 사람은 무료로 초대한다.”

식사 때마다 매번 새롭게 디자인하는 메뉴판은 한권의 아트북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은 오디오 디자이너 유국일씨와 협업해 ‘소리 음식을 담다’라는 주제로 코스 요리를 만들 었을 때 제작한 메뉴판.

식사 때마다 매번 새롭게 디자인하는 메뉴판은 한권의 아트북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은 오디오 디자이너 유국일씨와 협업해 ‘소리 음식을 담다’라는 주제로 코스 요리를 만들 었을 때 제작한 메뉴판.

-메뉴판이 아트 북 같다.
“재미있지 않나? 내가 아이디어를 내면 전담 디자이너가 만들어준다. 세계적인 오디오 디자이너 유국일씨와 협업할 땐 ‘소리 음식을 담다’라는 주제에 맞게 메뉴판을 진공관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오랜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엔 ‘오랜 만남 정으로 나누다’라는 컨셉트로 디자인한다. 접시에는 음식뿐 아니라 철학까지 담겨야 한다. 메뉴판도 음식의 한 요소다.”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그 것이 공개되면 나는 죽는다. 하하. 돈이 많지도 않지만 돈이 중요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자유로워야 더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연구소에서 ‘디너 행사’를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8년 전 잡지에 난 내 기사를 읽고 재계 총수의 부인 몇 분이 요리 수업을 부탁했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여러 번 부탁을 받고 보니 이 또한 요리연구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매주 새로운 메뉴를 준비하느라 스스로도 공부가 됐다. 수업 후에는 그날 만든 음식을 함께 먹고 얘기를 나눴다. 음식은 먹어봐야 제대로 만들 수 있다. 이후 알음알음 소개로 수강생이 늘었고, 이분들이 가족·지인과 함께 오고 싶다고 부탁해 코스 식사를 만들게 됐다. 예부터 상류층에서 시작된 문화가 전파가 빠르고 유행이 되기 때문에 이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씨는 제자들에게 ‘선비 같이 요리하라’는 뜻으로 서양식 셰프 모자 대신 조선시대 유생이 썼던 모자를 쓰도록 한다.

이씨는 제자들에게 ‘선비 같이 요리하라’는 뜻으로 서양식 셰프 모자 대신 조선시대 유생이 썼던 모자를 쓰도록 한다.

-연구원들이 ‘유생 모자’를 쓰고 일한다.
“한식을 하는데 왜 꼭 서양 셰프의 옷을 입어야 하나. 우리의 좋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실제로 외국인들이 정말 좋아한다. 선비같이 음식을 하라는 뜻도 있다. 정직하게, 자신을 속여서도 얼렁뚱땅 해서도 안 된다.”

-요리를 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부터 음식을 좋아했다. 3남1녀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늘 심부름은 날 시켰다. 두부를 사오라고 하면 형은 가게 주인이 주는 대로 사왔는데, 나는 어머니가 하시는 것처럼 뭐가 더 좋은지 따지고 덤도 달라고 했다. 커서는 인테리어·그림·사업도 해봤는데 사람의 감성을 가장 맞추기 힘든 게 음식이더라. 그런데 그만큼 매력이 있다. 음악이나 문학은 작품으로 남는데 음식은 설거지만 남는다? 하하. 진짜 감동적인 음식은 시 한 편처럼 가슴 깊이 남는 법이다.”

오는 5월 포시즌스 미식 여행에서 선보일 요리 ‘블랙’. 석이·능이 버섯을 30년 된 간장으로 조리하고 식용 숯가루와 군소를 넣어 식감과 향을 살렸다.

오는 5월 포시즌스 미식 여행에서 선보일 요리 ‘블랙’. 석이·능이 버섯을 30년 된 간장으로 조리하고 식용 숯가루와 군소를 넣어 식감과 향을 살렸다.

-접시에 올리는 차림새가 예술적이다. 어디서 영감을 얻나.
“좋은 식재료를 보면 이것의 특징을 어떻게 살려줄까 집중하게 된다. 향이 좋은 냉이를 만나면 이 향을 눈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한다. 선입견을 깨는 방법도 즐긴다. 송이·전복·소고기 같은 비싸고 귀한 재료들은 어떻게 담아도 사람들이 알아본다. 하지만 볼품없는 푸성귀를 좋은 그릇에 담으면 더 빛난다.”

-지난해 『미쉐린(미술랭) 가이드 서울편』이 발간됐다.
“한꺼번에 별이 너무 많이 나왔다. 별 3개는 정말 특별한 의미다. 그만큼 엄격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번엔 별 2개까지만 나왔으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참여한 ‘곳간 by 이종국’도 별 2개를 받았는데 과연 지난해 심사 당시와 지금의 곳간이 같을까 의문이다. 내가 메뉴를 짰고 내게 배운 사람들이 일하고 있지만 처음 기획했던 모습과 지금은 분명 다르다.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몇 년 새 셰프의 인기가 연예인 못지않은데.
“셰프 중에 연예인병에 걸린 이들도 있다더라. 주방을 떠난 요리사는 더 이상 요리사가 아니다. 외모에 신경 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요리연구가라는 호칭의 남발도 문제다. 요즘은 젊은 셰프들에게 조차 요리연구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연구가라면 적어도 10년 이상 자기 분야에서 일하고 족적을 남겼어야 자격이 있다. CIA나 르꼬르동블루같은 유명한 요리학교 나왔다고 다 요리연구가라고 부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식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시간이 만들어주는 맛이다. 봄에 난 식재료들은 영양 성분이 많다. 이걸 갈무리해서 여름에 먹고, 또 잘 저장해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겨울에 먹는다. 한식의 의미도 달라져야 한다. 구절판·신선로 이런 것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각지에 훌륭한 식재료가 얼마나 많은가. 이 땅에서 나는 식자재들을 눈여겨보고 잘 활용하는 것이 진짜 우리 음식이다.”

-한식 세계화에 대한 의견은.
“지금까지 너무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 불고기·비빔밥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한식도 고급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이를 막는 요소들이 많다. 김영란법도 그중 하나다. 좋은 음식 만들지 말란 얘기다. 말로는 우리 한돈·한우 써라 하면서 비용 걱정 하게 만든다. 좋은 식자재가 좋은 음식을 만든다. 많은 사람이 먹어줘야 더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식자재는 솔직히 비싸다. 국산 참깨로 직접 짠 참기름은 한 병에 수 십 만원도 한다. 파인다이닝을 추구하는 후배들이 요즘 참 어려워한다.”

‘금태구이와 유기농 채소’. 제철 생선인 북조기(금태) 안에 수삼채를 채우고 각종 고명을 곁들였다.

‘금태구이와 유기농 채소’. 제철 생선인 북조기(금태) 안에 수삼채를 채우고 각종 고명을 곁들였다.

-포시즌스 미식 여행의 출발지로 선정됐다. 어떤 요리를 선보일 건가.
“한국 음식을 제대로 보여줄 거다. 한국 음식 우습게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겠다는 얘기다. 사실 한식을 시작한 것도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리 음식이 너무 볼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말 포시즌스 본사 팀에서 와서 내 요리와 집을 촬영해갔다. 이때 먹는 숯과 석이·능이 같이 귀한 버섯으로 만든 요리 등을 보여줬다.(*지면에 소개된 음식들과 동일하다) 겨울과 봄의 식재료가 다르기 때문에 5월엔 메뉴가 조금 달라질 수는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바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어찌됐든 ‘이종국의 요리’ 아니겠나. 하하.”

-올해 본격적인 레스토랑을 연다고 하던데.
“지금 성북동에 공사중이다. 3월 오픈 예정이다. 비스트로와 파인다이닝 두 가지 콘셉트를 함께 운영할 거다. 1층 비스트로에선 가격을 15만원 정도로 낮추고, 2층 파인다이닝에선 지금처럼 50만원짜리 코스를 선보일 생각이다. 너무 비싸다고? 외국 유명 레스토랑에 가서 100만원, 150만원도 내고 먹으면서 왜 한식엔 유독 인색한지 모르겠다. 파인다이닝 공간에 오는 손님들에겐 환영 인사와 더불어 혹시 알러지가 있는지, 오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어떤 정도의 간을 원하는지 물어볼 거다. 그리고 오늘 음식의 주제와 식재료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거다. 술은 팔지 않을 생각이다. 어떤 술이든 가져와서 먹으면 된다. 한식은 어떤 술이든 받아줄 수 있다. 된장찌개는 왜 와인과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2012년 (아시아 최초의 와인 마스터)지니 조 리와 함께 한식과 와인의 페어링 행사를 진행했는데 당시 된장찌개를 마지막에 냈다. 그가 맛본 후 ‘와인과 된장찌개의 궁합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한식에 안 어울리는 술은 없다.”

-요리연구가로서 또 다른 계획은.
“내 음식이 하도 비싸다고들 해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중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논현동에 있는 호텔 카푸치노와 협업해 콩나물비빔밥 등 내가 만든 집밥 메뉴를 판매하고 있다. 메뉴 구성하고 직원 교육까지 다 맡았는데, 가격은 단품 기준 1만5000원부터라 저렴하다. 나로선 ‘호텔에서 즐기는 집밥’ ‘가장 서민적인 요리를 호텔에서 먹는다’는 것, 그리고 그걸 내가 만든다는 게 재미있었다. 3월에는 그동안 작업한 요리를 묶은 쿡북도 출간한다. 내가 죽으면 내 음식도 끝난다. 더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고 그래서 책도 출간하는 거다. 제목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인 ‘화중지병(畵中之餠)’이다. 그림 속의 떡, 음식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글=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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