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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강남 미식 지도를 다시 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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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쉐린 가이드 2017 서울’ 분석해보니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호림미술관. 이곳 M층엔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2017 서울 편’에서 별 세 개를 받은 모던 한식당 ‘가온’이 위치해 있다. ‘가온’ 앞에서 미쉐린 가이드를 손에 들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호림미술관. 이곳 M층엔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2017 서울 편’에서 별 세 개를 받은 모던 한식당 ‘가온’이 위치해 있다. ‘가온’ 앞에서 미쉐린 가이드를 손에 들었다.

올해 처음 발간한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서울 편’에서 별 받은 레스토랑 24곳 가운데 무려 12곳이 강남구에 있다. 특히 학동사거리 반경 700m 안에 몰려있어 이곳은 일약 미쉐린 벨트로 떠올랐다. 116년 전통의 프랑스 레스토랑 평가서는 왜 여기를 주목했을까.

‘미쉐린 가이드 2017 서울’ 분석해보니

핫플레이스가 맛플레이스로…학동사거리 ‘미식 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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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미슐랭) 가이드 2017 서울 편이 우리 외식업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현재 좋은 재료로 창의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일관되게 내는 서울의 미식 중심지는 강남구, 특히 학동사거리 반경 700m 이내 도산대로·언주로 일대라는 것이다.

모던 한식당 가온, 프렌치 식당 라미띠에 등
미쉐린 41곳 학동사거리 700m 내에 위치
보수적인 강북은 가성비 좋은 노포가 대세

“식당이 고객 눈높이 못 따라가는 강남”
미식 1번지 되기 전부터 이미 소비 1번지
젊은 셰프들의 파인다이닝 문화도 한몫

지난 7일 발간한 미쉐린 가이드 2017 서울 편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서울의 미식 지도를 다시 그렸다. 별을 딴 24개 레스토랑 중 절반(12개)이 강남구에 있다. 빕 구르망(Bib Gourmand·가성비 좋은 맛집)은 6곳, 추천 리스트로 이름을 올린 곳도 42곳이다. 모두 합쳐 60곳으로 책에 실린 147곳 중 무려 40%에 해당한다.

나머지 60%를 다른 24개 자치구가 갈라 가졌지만 이 또한 편차가 있다. 종로(30곳)·중(22곳)·서초(15곳)·용산(8곳)·마포(5곳)·영등포(4곳)구는 그나마 여러 식당을 올렸다. 송파·서대문·광진구는 각각 1곳만 이름을 올렸다. 이들 10개구를 제외한 동대문·성북·동작구 등 15개구는 아예 한 곳도 맛집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강남구는 왜 이렇게 많은 식당이 미쉐린 리스트에 올랐을까. 일단 강남구에 식당이 가장 많아서 그렇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서울 식당 11만9680개 중 9.6%(1만1492개)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식당수가 많은 마포구(7372개)와 비교(2016년 11월 서울시 통계)해도 유독 맛집 비율이 더 높다.

돈의 씀씀이로도 설명할 수 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팀이 올 1~10월 서울 요식업 가맹점 승인 실적을 분석한 결과 강남구 비중이 15.5%나 됐다. 인접한 서초구(8.3%)와 합하면 23.8%으로 서울 요식업 취급액의 4분의 1을 강남·서초 2개 자치구가 가져간 셈이다(단 일반 식당 뿐 아니라 단란주점·커피전문점·패스트푸드도 포함). 이처럼 풍부한 수요층을 바탕으로 여러 음식점이 치열하게 경쟁하다보니 좋은 레스토랑도 많아진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미쉐린 선정을 보면 강남구 집중만큼 눈에 띄는 게 또 하나 보인다. 바로 학동사거리 벨트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이 지역 밀집현상이다. 강남구의 미쉐린 리스트 60곳 가운데 무려 41곳이 학동사거리 반경 700m에 몰려 있다. 각 식당에 수여된 별이나 포크(편안한 분위기의 정도를 일러주는 픽토그램) 개수만으로도 물론 압도적이지만 레스토랑 면면을 보면 아우르는 음식 종류가 정말 다양해 역시 ‘미식 1번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미쉐린 별 2개를 받은 ‘권숙수’의 섬진강 참게찜.

미쉐린 별 2개를 받은 ‘권숙수’의 섬진강 참게찜.

가령 가온(별 3개)이나 권숙수(별 2개)·정식당(이하 별 1개)·밍글스·이십사절기 등 모던 한식당에선 제철 식재료를 창의적으로 조합해 한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지 않은 독특한 요리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리스토란테 에오나 알라 프리마에선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이탈리안 음식을, 라미띠에·보트르 메종에선 세련된 프렌치 음식을 만날 수 있다. 저녁 오마카세(요리사가 알아서 내주는 요리)가 1인분에 35만원인데도 예약을 못해 못 먹는다는 스시집 코지마는 어떤가. 트렌드가 차고 넘치는 압구정 한복판에서 고집스럽게 진주식 한정식을 유지해온 하모도 있다(이상 별 1개).

별 뿐 아니라 빕 구르망, 기타 추천을 포함한 음식점 리스트에서도 게장·만두·이탈리안·프렌치·스테이크하우스·족발 등 다채로운 장르가 다 포함돼있다. 미쉐린 분류 기준 32가지 가운데 절반이 넘는 17가지(종로구는 13가지)다.

이렇게 다양한 맛집이 어떻게 이 좁은 지역에서 맛집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일단 지리적 접근성이 좋다. 강북이나 분당 쪽에서 넘어올 때 딱 중간이라 자가용 이용객들이 선호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지역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도전할 때 이 지역을 선택한다. 모던 한식에 천착해 온 권우중 셰프가 이태원 이스트빌리지를 신사동으로 옮겼다가 지난해 이곳에 권숙수를 낸 사연도 딱 그랬다.

“이태원에선 점심 장사가 안됐어요. 점심에 객단가 4만~5만원을 감당할 수 있는 수요층은 아무래도 청담동 쪽에 제일 많거든요. 게다가 접근성이 좋고 발렛파킹 등 주차 서비스도 원활해 강북이나 분당에서도 많이 넘어오고요. 주변에 럭셔리 브랜드 플래그십이나 갤러리가 많아서인지 전반적인 미식 소비 수준도 높아요.”

돌이켜보면 이곳은 ‘미식 1번지’이기 이전에 이미 ‘소비 1번지’였다. 1990년대부터 압구정동을 포함해 도산공원 일대는 줄곧 핫한 곳이었다. 갤러리아 명품관을 중심으로 스타일 트렌드를 선도했다.

‘리스토란테 에오’의 캐비어로 맛을 낸 크레스펠레.

‘리스토란테 에오’의 캐비어로 맛을 낸 크레스펠레.

레스토랑·바(bar) 역시 청담동이 트렌드를 이끌어갔다. 2006년 청담사거리 쪽에 둥지를 튼 리스토란테 에오의 어윤권 셰프는 청담동을 가리켜 “잔인한 곳”이라고 표현한다.

“고정 수요가 꾸준한 대신 식당이 고객 눈높이를 못 따라가는 곳이죠. 재력을 갖추고 해외 경험까지 활발한 사람들이 주류이니 (식당이) 살벌하게 교체돼요. 청담동에서 유행따라 장사하면 6개월도 못 버팁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인근엔 미식에 대한 기준이 명확한 데다 그걸 소비할 수 있을만큼 주머니가 두둑한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 수요에 기대어 자기만의 스타일로 승부하고 싶은 이들이 둥지를 튼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검증된 식당만이 살아남는다. 비록 별은 받지 못했어도 추천 리스트에 오른 상당수 맛집 역시 이렇게 트렌드를 이끌어온 식당들이라고 보면 된다. 정통 프렌치를 고집스럽게 추구해온 레스쁘아 뒤 이부(임기학 셰프), 1999년부터 청담동을 지키고 있는 팔레 드 고몽, 1981년 이곳에 자리 잡아 공원식 갈비집의 새 역사를 연 삼원가든 등이 다 그렇다.

인근 가로수길은 물론 강북의 경리단길·서촌이 들썩이고 연트럴파크(연남동)와 상수동이 맛집 골목으로 한동안 주목을 받긴 했다. 이번 미쉐린 가이드는 이런 라이징 스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트렌드를 이끌고 혁신이 일어나는 곳은 학동사거리 반경 700m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해석도 있다. 이미 양질의 파인다이닝 문화가 정착되다보니 비슷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모이는 집적 효과라는 분석이다. 특히 모던 한식은 임정식 오너 셰프가 2009년 문을 연 정식당이 안착하면서 인근에 이 같은 스타일이 퍼지는 좋은 선례가 됐다.

“강북에도 부촌은 많아요. 다만 그들은 (한식의) 변화나 도전에 대해 보수적이죠. 강남 쪽엔 제가 하려는 음식을 이해할 소비 계층이 많아서 처음부터 청담동 쪽으로 물색했어요.” 2014년 문 연 모던 한식당 밍글스 강민구 오너셰프의 말이다.

좋은 음식에 큰돈 쓰는 걸 아끼지 않고, 다채로운 미식 경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이들을 겨냥해 패기 넘치는 젊은 오너 셰프들이 잇따라 둥지를 틀면서 학동 사거리의 미식 영향력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셰프 네트워크’는 신진들의 진입장벽을 낮춰 더욱 다채로운 파인다이닝 신(scene)을 만들어가고 있다. 추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주옥은 강민구 셰프와 함께 마이애미 노부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신창호 셰프가 올 상반기에 문을 연 한식 비스트로다. 강 셰프와 신 셰프가 함께 돌아다니며 입지를 물색했다고 한다. 걸어서 200m도 떨어지지 않은 두 레스토랑은 식자재가 떨어지면 나눠주고 일손이 급할 때 도와주기도 한단다.

“손님이 넘치면 서로 소개해 보내주기도 하고, 구인·구직 관련 정보도 교류해요. 음식에 관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토론하기도 좋죠.”(강 셰프)

파인다이닝으로 별을 받은 식당은 강남에 차고 넘치지만 ‘빕 구르망’ 즉 가성비 좋은 음식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강남구 전체가 6곳, 학동 사거리 인근은 3곳만 포함됐다. 빕 구르망은 도시별로 객단가 기준이 있는데 한국은 1인당 저녁값이 3만5000원 이하(유럽 35유로, 일본 5000엔, 미국 40달러)다. 빕 구르망은 주로 종로·중구 일대의 노포(老鋪)들에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해요. 임대료나 인건비 측면에서 강남에선 노포 스타일 음식점을 할 수가 없거든요. 객단가를 높여야 매출이 커지고 유지가 되기 때문에 시장도 거기 맞춰 변해왔어요.”(권우중 셰프)

전체적으로 보면 서울의 미식 지도는 강북의 종로·중구, 강남의 학동사거리 일대가 양분하는 모양새다. 전자는 가성비 좋은 오래된 노포가, 후자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나 특색 있는 모던 레스토랑 위주다.

물론 미쉐린 가이드가 116년 전통의 권위있는 미식 평가서라고 해서, 그 기준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한식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사람이 식당을 평가했다고 볼 수 없다”(김순경 음식칼럼니스트)거나 “글로벌 기준을 기대했는데 3스타가 한식당에만 주어져 의아하다”(이윤화 다이어리R 대표)는 식의 비판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미쉐린 본사의 마이클 앨리스 인터내셔널 디렉터는 “미쉐린 가이드는 세계적으로 동일 기준으로 음식점을 평가한다”며 “그 덕분에 여행자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이 기준으로 균질한 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고 해명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서울을 찾아올 세계의 많은 미식가와 여행객을 고려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영어 메뉴판도 없고 말도 안통하고 때로 위생에도 문제 있는 식당을 가이드에 올릴 수 없었을 것”(권 셰프)이다.

그런 점에서 미쉐린이 그린 미식 지도에 우리가 얼마나 점을 더 찍을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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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특급호텔의 굴욕 별 받은 레스토랑 ‘0’

추천 리스트에 오른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테이블 34’.

추천 리스트에 오른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테이블 34’.

올해 처음 나온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서울 편을 받아들고 가장 곤란해진 곳은 특급호텔들이다. 특히 강남권 호텔 레스토랑은 별은 고사하고 전체 147개 리스트에도 거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최고 상권으로 일컬어지는 강남 일대 특급호텔 중에 그나마 체면치레를 한 곳은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 호텔이다. 이 호텔 34층의 프렌치 레스토랑 ‘테이블 34’와 1층 로비의 일식당 ‘하코네’가 나란히 추천 리스트에 들었다. 이웃한 코엑스 인터컨티넨털은 물론 반포 JW메리어트서울, 삼성역 파크하얏트, 역삼동 리츠칼튼 등은 모두 단 한 군데의 레스토랑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수의 별 레스토랑이 강남구에 몰린 것과 대조적이다.

이를 두고 ‘예상된 참변’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국내 레스토랑 평가서 ‘블루리본’을 11년째 발간해 온 김은조 편집장은 “강남 호텔들이 외형은 키워왔지만 외식업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꼬집었다. 지난달 나온 ‘블루리본 2017’에서도 최고 수준인 리본 세 개가 23개 레스토랑에 주어졌는데 강남 특급호텔 중에선 파르나스의 ‘테이블34’만 포함됐다.

서울 전역으로 확대해도 별을 받은 레스토랑 24곳 중 호텔 레스토랑은 딱 3곳이다. 신라호텔은 한식당 ‘라연’이 별 3개를 받아 자존심을 지켰지만 중식당 ‘팔선’과 일식당 ‘아리아케’ 모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롯데호텔 역시 프랑스 특급식당의 분점 격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별 2개를 받았을 뿐이다. ‘라연’과 라이벌이라던 한식당 ‘무궁화’나 중식당 ‘도림’은 추천리스트에 만족해야 했다. 웨스틴조선호텔 역시 ‘스시조’(일식) ‘홍연’(중식)이 기타 추천에 포함되는 데 그쳤다. 동대문 메리어트 호텔은 스테이크하우스 BLT의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의 레스토랑도 인정받지 못했다.

 호텔 중식당으로 유일하게 별을 딴 포시즌스 ‘유 유안’.

호텔 중식당으로 유일하게 별을 딴 포시즌스 ‘유 유안’.

최대 수혜자는 개장 1년밖에 안 된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이다. 중식당 ‘유 유안’이 별 1개를 받은 것을 비롯해 ‘키오쿠’(일식) ‘보칼리노’(이탈리안)가 추천 리스트에 올랐다. 더플라자 호텔 관계자는 “미쉐린 첫 해만 보고 일희일비할 순 없다. 일종의 해외 컨설팅업체에서 평가받은 걸로 생각하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글=강혜란 기자 · 오준엽 인턴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중앙포토, 각 업체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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