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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안주해 원가 싸움 벌이다 성공의 덫에 걸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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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18면


후진국일수록 생계형 창업을 중심으로 의식주 산업형 기업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반면 선진국으로 갈수록 좋은 산업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파괴적 기술이나 파괴적 마케팅이 활성화되고 이를 기회로 활용하는 기회형 창업이 많이 일어난다. 문제는 중간소득 국가가 되면 현실에 안주하면서 미래 성장 엔진에 대한 불확실한 투자를 꺼리게 된다는 점이다. 중간소득 국가의 기업들은 어렵고 힘든 글로벌시장 개척보다는 내수시장에 몰입하고, 미래의 기술 개발보다는 현재의 기술로 원가 싸움에 집착한다. 그 결과 중간소득 국가의 기업가정신이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보다 낮아지면서 1인당 국민소득에 따른 기업가정신 곡선이 스마일 모양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1인당 소득 3만 달러 전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중간소득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유럽국가 가운데 심각한 재정적자를 겪고 있는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PIGS)은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통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은 약화되는 가운데 혁신 없는 기업 생태계가 노화되는 ‘성공의 덫(Success Trap)’이다. 기업 건강성의 유지를 위해서는 연구개발(R&D)과 신제품 창조, 글로벌시장 개척, 이를 위한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기업가정신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PIGS국가들은 기업가정신이 위축되고 있다.

[생계형 창업보다 독일식 기술 창업 바람직]
그리스 경제를 보자. 국내총생산(GDP)의 70% 이상이 내수고, 취업자의 약 25%가 공무원이다. 공무원 급여에 전체 국가재정의 45%(GDP의 23%)를 쓰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정부 부채로 디폴트 상황을 겪었지만 과도한 복지정책이 유지되면서 재정적자만큼 국가부채가 증가하고 있다.


1970년 자동차 185만 대를 생산했던 이탈리아는 현재 생산량이 79만 대로 줄었다. 2011년 수입차 비율이 84%다. 국내생산 비중이 2000년 60.8%(158만 대)에서 2010년 33.3%(74만 대)로 축소됐다. 세계 선글래스 시장의 80%를 차지했던 이탈리아 룩소티카는 최근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미국 와비파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와비파커는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전통산업은 도전받고 있지만 새로운 혁신이나 신성장동력 개발에는 실패하고 있다.


스페인도 1인당 소득은 2만7000달러로 한국(2만7600달러)과 비슷하지만 2012년 부동산 및 은행이 파산한 이후 유럽연합(EU) 구제금융을 받고 있다. 재정 적자를 줄여야 하는데 긴축에 대한 정치권의 반발이 심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업률이 17.6%(2013년 기준)에 달하는 포르투갈도 강도 높은 긴축 조치가 필요하지만 노동자총연맹을 중심으로 반대가 심하다. 지금 포르투갈은 러시아워가 없다고 한다. 출근할 일도, 택시탈 일도 없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온다.


PIGS는 전통산업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1인당 소득 3만 달러대에 올라서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지만 혁신을 이루지 못하면서 절반의 실패를 겪고 있다. 비가 오면 우산을 팔고, 햇빛이 나면 양산을 팔아야 하는데 비가 오는데도 계속 자신의 전통적 강점인 양산만 팔려 하다 보니 시장과의 미스매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전통산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범용제품(commodity)화 되면서 원가가 낮은 개발도상국의 진입으로 레드오션이 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기존 전통산업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새로운 산업으로의 도약을 위한 파괴적 기술혁신이 필요하다.


일본 역시 자민당 정권이 끝나고 무라야마 사회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연합정권이 출범한 1995년 비슷한 선택을 했다. 혁신과 개혁보다는 복지와 재정투자에 초점을 맞췄다. 지방에 도로와 수많은 레크레이션 시설이 생겼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용하지 않는 도로가 됐고, 지방자치단체가 파산하는 원인이 됐다. 니폰 이치(일본에서 1등)를 외쳤고, 해외 시장과 고립되는 갈라파고스 증후군이 생기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반면 독일은 생계형 창업이 아니라 기술창업 등 개선기반 기회추구(Improvement-driven Opportunity)형 기업가 활동과 글로벌시장 도전으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글로벌기업가정신모니터(GEM)에 의하면,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기술 개선을 위해 매출액의 6% 이상을 R&D에 투자하고 있으며, 매출의 60% 이상을 해외시장에서 올린다. 덕분에 10%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 투자, 기업 효율성 등 하위권]

우리나라는 지금 1인당 소득 3만 달러의 문턱에서 PIGS로 갈 것인지, 독일로 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사회 분위기와 정치적 선택은 이미 현재의 복지를 향하고 있다. 기업은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기보다는 현금관리에 치중하고 있다. 지나치게 낮은 부채비율이 이를 말해준다. 고용 창출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투자 없이 시장 없고, 시장 없이 고용 창출은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영자들은 재임 중 배임 혐의를 피하려는 움직임만 보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승진한다는 말은 공공연한 사실이 되고 있다.


도전의 측면에서 보면 배임과 기업가정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다 실패하면, 경영자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더 나아가 배임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는 배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해 도전문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성공한 기업인도 박수를 받지 못한다. 종업원을 배려하지 않는 독불장군식 기업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국가성장인프라는 점차 악화되고 있다. 스위스 IMD 국가경쟁력 평가에 의하면 한국은 국제 투자에서 2015년 32위에서 2016년 35위로 떨어졌고, 기업관련법의 효율성(46위), 사회적 여건(40위), 기업 효율성(48위) 등이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2015년 GEM에 의하면 창업한 지 3년 6개월이 되지 않은 기업가 비율을 의미하는 창업기업가정신지표(TEA)에서 우리나라는 조사대상 60개국 중 37위에 그쳤다.


무엇보다도 청년들에게 기회와 희망도 주지 못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을 아세안 국가들을 비롯해 성장하는 해외시장으로 보내 도전하고, 경험하고, 해외시장을 염두에 둔 창업을 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내수형 창업은 이미 과밀한 소상공인 창업의 연장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년간 스타트업 지원정책으로 상당한 창업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제 창업기업 육성과 성장을 지원하는 스케일업(scale-up) 정책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이 성장기업이 돼야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다행히 전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2006년 이후 지금까지 10년 이상 1인당 GDP 2만 달러대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 경제에 새로운 혁신의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조선과 중공업이 무너지고 있다. 이제 기업인들도 과거의 성공에 기대어 변화를 무시하는 성공의 저주(curse of success)를 경계해야 한다. 디지털시대를 넘어 스마트시대에 필요한 창조성과 이를 시장화할 수 있는 글로벌화 정책이 필요한 때다.


두 개의 시간이 있다. 카이로스(kairos)와 크로노스(kronos)다. 연대기(Chronicle)의 어원인 크로노스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통해 결정되는 시간을 말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기회와 결단의 시간이다. 카이로스가 크로노스보다 무서운 이유는 기회가 사라지지 않고 배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잡지 못한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중소기업이 내수시장이 아니라 글로벌시장에 도전하고, 젊은이들이 해외시장 도전의 주역이 되고, 연구소에서는 기존 제품의 원가절감을 넘어 파괴적 기술개발에 도전하는 카이로스적 결단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기회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업가정신만이 우리사회의 만연한 패배감을 새로운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전 세계중소기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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