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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서울서 맛보는 옛 주막 재미…명주와 야성의 안주 '막걸리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주점 ‘막걸리이야기’에서 요즘 가장 많이 팔리는 ‘수육과 생김치’ 안주. 수육은 돼지 다리살을 재래된장·매실액·사과·설탕 넣고 삶아서 식힌 것이다. 뒤에 세운 막걸리는 이 집에서 취급하는 14종 가운데 많이 팔리는 다섯 가지다.

주점 ‘막걸리이야기’에서 요즘 가장 많이 팔리는 ‘수육과 생김치’ 안주. 수육은 돼지 다리살을 재래된장·매실액·사과·설탕 넣고 삶아서 식힌 것이다. 뒤에 세운 막걸리는 이 집에서 취급하는 14종 가운데 많이 팔리는 다섯 가지다.

오늘은 섣달그믐이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과 막걸리 마시는 기분으로 주막 얘기를 해보려 한다. 사당역 근처 남현동에 전통주 전문 주점 ‘막걸리 이야기(서울 관악구 남부순환로272길 8/전화 02-588-1516)’가 있다. 각 지역의 유명 막걸리 14종과 증류주 1가지를 파는 허름한 집이다. 막걸리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송명섭막걸리’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파는 주점으로 소문이 나있다.

전통 농경사회는 음력으로 시절을 구분한다. 나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 19년 2개월을 살았다. 그래서 설(음력)을 쇄야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관념이 강하다. “섣달그믐이면 나갔던 빗자루도 집 찾아온다” 했다. “숟가락 하나라도 남의 집에서 설을 지내면 서러워서 운다”는 말도 전한다. 설이 돌아와도 이제 고향에 갈 일이 없다. 피붙이가 아무도 살지 않기 때문이다. 꽤 오래됐다. 갈 기회가 없으니 그리움은 더 그윽하다.50년 전 시골마을의 섣달그믐은 명절 분위기가 참 떠들썩했다. 집집마다 설 채비하느라 기름진 음식 내음이 온 동네에 진동했고, 집 떠나 도시에서 돈벌이하던 자식들은 선물 꾸러미 잔뜩 들고 앞다퉈 귀성(歸省)했다. 초등학교 겨우 마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고향을 찾는 그들의 걸음은 흥겹고 어엿했다. 저녁상을 물리면 가족끼리, 또래끼리 모여 쌓인 회포는 풀고 미뤄둔 정은 나누느라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런 자리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막걸리였다. 단속이 심하던 때지만 설이면 많은 집이 마음을 졸이며 술을 담갔다. 설 차례와 세배객 맞이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당국도 명절 무렵에는 슬쩍 눈감아준 듯도 했다. 쌀·누룩·물만으로 빚는 시골 밀주로 나는 술을 배웠다. 스무 살에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그런 술을 구경하기는 어려웠다. 32년이 지난 2010년 어느 날 마신 막걸리는 무릎을 치게 했다. 고향에서 먹던 바로 그 맛이었다. 서울 합정동 막걸리 전문점 ‘세발자전거’에서 마신 ‘송명섭막걸리’였다. 퉁명하고 거친 듯하지만 깔끔하고 힘찬 맛, 인공감미료 단맛 없고 마시고 나면 혀와 입천장을 한껏 밀착시키는 뒷맛. 잃어버린 고향의 맛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바로 ‘송막’ 애호가가 됐다.

수육에 나오는 생김치는 굴과 사과가 넉넉히 들어가 내용도 맛도 화려하다.

수육에 나오는 생김치는 굴과 사과가 넉넉히 들어가 내용도 맛도 화려하다.

주점 ‘막걸리이야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기본안주와 막걸리. 양념을 옅게 해서 2년 묵힌 배추김치는 짜지 않고 잘 익어 막걸리 안주로 좋다. 매년 500포기를 담가 상마다 기본안주로 낸다.

주점 ‘막걸리이야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기본안주와 막걸리. 양념을 옅게 해서 2년 묵힌 배추김치는 짜지 않고 잘 익어 막걸리 안주로 좋다. 매년 500포기를 담가 상마다 기본안주로 낸다.

송명섭(60)씨는 전북 정읍의 ‘태인합동주조장’ 주인으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 전통술 담그기(죽력고) 기능 보유자이고,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48호(분야: 죽력고 제조 가공)다. 무형문화재인 ‘죽력고(竹瀝膏)’를 증류하기 위해 빚는 술이 ‘송명섭막걸리’다. 송씨는 직접 농사 지은 쌀을 장작불 지펴 익힌 고두밥, 직접 재배한 밀로 띄운 누룩, 물 세 가지만으로 막걸리를 담근다. 다른 첨가물은 전혀 넣지 않는다. 직접 띄운 누룩으로 빚어야 전통 막걸리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양조장은 많지 않다. 보통은 공장에서 생산한 입국(粒麴)을 사용한다. 그런데 송씨는 밀 농사부터 손수 짓는다. 자신의 이름을 상품 브랜드로 쓰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술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다.

이 술에 대한 술꾼들 반응은 명료하게 갈린다. 좋아하는 사람은 으뜸으로 꼽는다. 대개 막걸리 고수들이다. 싫다고 하는 사람은 맛이 너무 거칠다며 거부한다. 주력(酒歷)이 길지 않거나 감미료 첨가해 단맛 나는 막걸리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쯤 되면 ‘송명섭막걸리’를 간판의 일부로 쓰고 있는 주막 ‘막걸리이야기’의 분위기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홍어 명인(07-183호) 나주 영산포 안국현씨가 삭힌 국내산 홍어 한 접시. 4만원을 받지만 남는 것이 없는데 막걸리 집이니까 구색 갖추려고 메뉴에 넣었다. 양념은 직접 익힌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만 준다. 홍어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 색깔만 보아도 품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홍어 명인(07-183호) 나주 영산포 안국현씨가 삭힌 국내산 홍어 한 접시. 4만원을 받지만 남는 것이 없는데 막걸리 집이니까 구색 갖추려고 메뉴에 넣었다. 양념은 직접 익힌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만 준다. 홍어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 색깔만 보아도 품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벌교에서 공급받는 피꼬막찜. 알의 크기가 한 입에 먹기 벅찰 정도로 크다.

벌교에서 공급받는 피꼬막찜. 알의 크기가 한 입에 먹기 벅찰 정도로 크다.

기자 출신이면서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52)씨는 일찍이 2013년 11월 이 집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사당역 부근의 숨은 집. 자그마한데 지역 막걸리를 다양하게 갖췄다. 안주가 이 집의 진짜 매력. 아주머니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한정식 집을 크게 했었단다. 안주가 다 입에 붙는다. 굴 무침에 애호박전도 감치고, 문어도 좋다. 값은 좀 있는 편. 내가 좋아하는 김포의 ‘선호’ 막걸리 한잔에 슬슬 풀리는 마음. 뻔한 사당역 먹자촌의 인심에 심드렁한 분들께 추천.”

짧은 평이지만 특징을 간취한 핵심어는 다 들어있다. ▷다양한 지역 막걸리 ▷안주가 진짜 매력(값은 좀 있는 편) ▷여주인(이건남·59)은 한정식 집 하던 아주머니.현재 들여놓은 지역 술은 증류주 1종과 막걸리 14종이다. ▷죽력고(32도 700mL 8만원) ▷송명섭 막걸리(6도 900mL 6000원) ▷술 그리다(옛 천비향/10도 500mL 1만원, 14도 500mL 1만5000원) ▷술 취한 원숭이(10.8도 375mL 1만원) ▷도문대작(10도 750mL 8000원) ▷해창막걸리(6도 900mL 7000원) ▷아리랑막걸리(6.5도 750mL 6000원) ▷금정산성막걸리(8도 750mL 5000원) ▷장흥 안양동동주(6도 800mL 5000원) ▷한산모시막걸리(6도 900mL 5000원) ▷문경오미자막걸리(6.5도 750mL 4000원) ▷선호·백련·덕산막걸리(6도 750mL 각 4000원). 손님들 반응에 따라 술 종류는 조금씩 바뀐다. 처음엔 손님들이 찾는 대로 들여놔 70여 가지를 취급하던 적도 있다. 그 중 많이 팔리는 것 고르고 골라 15가지로 줄였다.

안주는 지역 특산물을 직거래하며 조리와 가미를 최소화한 음식을 주로 낸다. 철 따라 물목이 바뀌는데 요즘 안주는 7가지다. 해산물이 주종이고 국물음식은 없는 게 특징이다. ▷돼지고기 수육과 생김치 ▷국내산 홍어(이상 각 4만원) ▷벌교 문어(3만~5만원) ▷벌교 피꼬막 ▷생굴김치 ▷피조개(이상 각 3만원) ▷삼천포 김부각(1만원). 벽에 붙인 차림표에는 주인이 직접 쓴 도안 글씨로 커다랗게 “화학조미료·향신료·가공식품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쓴 글이 눈에 띈다.

생굴김치에는 매일 택배로 받는 싱싱한 통영 굴이 듬뿍 들어갔다.

생굴김치에는 매일 택배로 받는 싱싱한 통영 굴이 듬뿍 들어갔다.

사천시 삼천포에서 받아 쓰는 김부각은 여러 차례 문제 제기와 수정을 거쳐 제품이 완성 됐다. 손님들이 좋아해 다른 주점에 납품 연결도 해주었다.

사천시 삼천포에서 받아 쓰는 김부각은 여러 차례 문제 제기와 수정을 거쳐 제품이 완성 됐다. 손님들이 좋아해 다른 주점에 납품 연결도 해주었다.

모든 상에 내는 기본안주 묵은 배추김치는 양념을 한 듯 안 한 듯, 볼품없어 보이지만 맛이 예사롭지 않다. 막걸리와 궁합이 맞는 안주이지만 다른 음식에 곁들여도 미각을 한껏 돋워준다. 담글 때 부재료를 모두 갈아서 양념을 진하지 않게 하고, 국물에 푹 잠기게 저장해 2년을 익혔다. 꺼내 국물을 꼭 짜서 잘라 한 토막씩 접시에 담아 낸다. 해마다 배추 500포기를 담근다. 3년을 묵혀봤더니 2년째보다 맛이 덜했다.

수육은 족발 만드는 돼지 다리살을 재래된장·매실액·사과·설탕 푼 물에 넣고 삶아서 만든다. 고기가 푹 잠기도록 해 1시간30분을 삶고 뚜껑을 닫아둔 채 완전히 식을 때까지 뜸을 들인 다음 꺼내서 자른다. 수육을 토하젓에 찍어 먹어야 하는데 구하기 어렵고 값도 비싸서 쓸 수가 없다. 일반 새우젓 내놓느니 안 하겠다는 생각으로 생김치와 한 접시에 담아서 낸다. 생김치는 내용도 맛도 무척 화려하다. 배추 고갱이, 저민 사과, 굴이 비슷한 양으로 섞여 있다. 주말에는 손이 많이 가서 수육은 하지 않는다.

‘막걸리이야기’에서 마실 수 있는 전통주 종류는 증류주 1종과 전국의 막걸리 14종이다. ‘막걸리+단백질’이라고 쓴 것은 막걸리 안주로는 단백질이 좋더라는 주인의 생각이 담겨있다.

‘막걸리이야기’에서 마실 수 있는 전통주 종류는 증류주 1종과 전국의 막걸리 14종이다. ‘막걸리+단백질’이라고 쓴 것은 막걸리 안주로는 단백질이 좋더라는 주인의 생각이 담겨있다.

냉장고에 쟁여둔 전국의 유명 전통주들. 가장 많이 보이는 ‘송명섭막걸리’는 직접 농사지은 쌀·밀과 물만으로 담가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은 원단 막걸리다. ‘막걸리 이야기’는 전국에서 이 술을 가장 많이 파는 주점으로 알려져 있다.

냉장고에 쟁여둔 전국의 유명 전통주들. 가장 많이 보이는 ‘송명섭막걸리’는 직접 농사지은 쌀·밀과 물만으로 담가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은 원단 막걸리다. ‘막걸리 이야기’는 전국에서 이 술을 가장 많이 파는 주점으로 알려져 있다.

홍어는 대한민국명인회가 선정한 음식부문 최초 홍어 명인(07-183호)인 나주 영산포의 안국현(61)씨가 삭힌 국내산을 받아 쓴다. 몸통 살 12점에 자투리 살을 조금 얹어 한 접시 4만원을 받는데, 남는 것이 없지만 막걸리 집이니까 구색 맞추려고 메뉴에 넣었단다. 양념은 직접 익힌 막걸리식초로 만든 초고추장만 준다. 다른 양념은 달라고 해도 안 준다. 삭힌 정도는 전라도 출신이 아니라도 먹을 수 있도록 너무 진하지 않게 했다. 김부각은 삼천포에서 받는다. 처음 받아 보니 짜고 너무 튀겨서 타고, 문제가 많았다. 몇 번을 수정해서 제대로 만들게 되면서 여러 업소에 소개도 해줬다. 튀김용으로 좋은 카놀라유로 튀긴다. 피꼬막·문어·낙지는 벌교, 굴은 통영에서 받는데 1kg에 얼마냐고 한 번도 물은 적 없이 믿고 거래한다.

안주 차림표에는 “화학조미료·향신료·가공식품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씌어있다. 주인의 음식에 대한 소신과 고집을 보여주는 표지 같다. 글씨는 모두 여주인이 직접 썼다.

안주 차림표에는 “화학조미료·향신료·가공식품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씌어있다. 주인의 음식에 대한 소신과 고집을 보여주는 표지 같다. 글씨는 모두 여주인이 직접 썼다.

예전에는 요리도 못했고 지금도 술은 한 잔도 못 하지만(“여자가 어떻게 술을 먹어요” 하는 정도) 술과 안주의 원리를 나름대로 터득했다. 막걸리는 단백질 안주랑 궁합이 맞고, 기름기 많은 안주랑 먹으면 숙취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김치랑 먹는 수육 안주를 만들었다. 이씨는 자신의 안주에 대해 “조리를 적게 하고 원재료 중심으로 내준다. 먹는 건 비싸도 좋은 걸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료를 좋은 거 쓰니까 겉치레 안 하고 복잡한 조리 안 해도 맛이 있다. 해산물 중심으로 산지에서 택배로 직송 받아서 쓴다. 그래서 시장에 갈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유리창에는 ‘먼저 드세요’라는 글이 붙어있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 이유를 물었다. 주인은 “요즘 사람들은 먹으면서 이 말을 안 하더라. 어린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먼저 먹는다. 보는 내가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러지 말고 상대에게 ‘먼저 드세요’라고 말한 다음 먹을 생각을 해보라고 써 붙인 거다”라고 설명했다. 주인의 성품이 엿보이는 얘기다.

한 사람 움직이기도 좁을 것 같은 주방. 여주인은 좋은 재료로 조리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음 음식이라는 생각하기도 하지만 혼자 주점을 운영해 복잡한 음식은 할 수가 없다.

한 사람 움직이기도 좁을 것 같은 주방. 여주인은 좋은 재료로 조리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음 음식이라는 생각하기도 하지만 혼자 주점을 운영해 복잡한 음식은 할 수가 없다.

하얀 병에서 식초가 익어가고 있다. 식초 발효에는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둥이를 막지 않고 공기가 통하는 한지로 감쌌다. 왼쪽 유리병에는 잘 익은 식초가 담겨 있다. 이 집에서는 식초를 만들 수 있는 생막걸리만 팔고, 양념으로는 직접 익힌 식초만 쓴다.

하얀 병에서 식초가 익어가고 있다. 식초 발효에는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둥이를 막지 않고 공기가 통하는 한지로 감쌌다. 왼쪽 유리병에는 잘 익은 식초가 담겨 있다. 이 집에서는 식초를 만들 수 있는 생막걸리만 팔고, 양념으로는 직접 익힌 식초만 쓴다.

 주막에 들어서면 벽에는 온통 낙서가 가득하다. 대부분 한자다. 입구 오른쪽 문설주 옆 벽 첫머리에 ‘瑞氣?門(서기집문; 상서로운 기운이 모이는 문)’이라는 글이 씌어있다. 그 다음에 시선(詩仙) 이태백(701~762)의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산중에서 속세를 피해 조용히 사는 이와 잔을 마주하다’라는 뜻이다. 많이 알려진 한시의 고전이다.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 둘이 술잔 마주하니 산 꽃이 피고
一杯一杯復一杯(일배일배부일배; 한 잔 또 한 잔에 다시 한 잔이라
我醉欲眠君且去(아취욕면군차거; 나는 취해 자고프니 그대 우선 가시게
明朝有意抱琴來(명조유의포금래;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오시게)

술 마시고 한시 원문을 벽에 일필휘지로 낙서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이 집의 단골들이라는 얘기다. 서울대 교수들이 가장 많고 그 문하생들이 뒤를 잇는다. 단골들은 술만 고르고 안주는 주문 않고 그날 좋은 걸 주는 대로 먹는다. 밤 10시에 문을 닫는데 마시고 있는 손님이 있거나 늦게 들어온 젊은이들이 있으면 알아서 먹고 가라고 먼저 퇴근한다. 손님들이 주인에게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마시고 계산하고 문 잘 잠그고 간다. 쉬는 날에 문을 닫아놔도 단골들은 자물쇠 번호 알아서 열고 들어와 먹고 간다. 손님이 카드 긁어 계산까지 한다. 담배만 안 피우면 된다. 주인은 “단골들을 손님이라고 생각 안 한다. 한번 오면 다 식구다. 먹고 계산 안 하고 간들 어쩌겠는가. 마음이라도 편한 게 낫지”라고 열린 마음을 드러냈다. 전화기에 등록된 단골 전화번호가 1000개쯤 된다. 이름 대신 사람의 특징이나 만난 상황으로 적어놨다. 예컨대 ‘그때 그 자리 주세요’ ‘서비스예요?’ ‘진상’ ‘맛집또라이’ ‘얌전’ 등이다.

눈발이 날리던 지난 토요일(21일) 오후의 막걸리 전문 주막 ‘막걸리이야기’. 사당역 부근 에 있는 이 집은 ‘송명섭막걸리’를 간판의 일부로 쓴다.

눈발이 날리던 지난 토요일(21일) 오후의 막걸리 전문 주막 ‘막걸리이야기’. 사당역 부근 에 있는 이 집은 ‘송명섭막걸리’를 간판의 일부로 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에는 낙서투성이다. 첫 줄이 ‘瑞氣?門(서기집문; 상서로운 기운이 모이는 문)’. 이어서 이태백(701~762)의 시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이 적혀있다. 출입문 유리창에는 ‘사계절 지역 특산물’이라는 글이 이 집의 자부심을 알리고 있다. 밖에는 눈발이 날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에는 낙서투성이다. 첫 줄이 ‘瑞氣?門(서기집문; 상서로운 기운이 모이는 문)’. 이어서 이태백(701~762)의 시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이 적혀있다. 출입문 유리창에는 ‘사계절 지역 특산물’이라는 글이 이 집의 자부심을 알리고 있다. 밖에는 눈발이 날린다.

 주점을 혼자 운영하는 여주인 이씨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함평이씨 종가의 딸로 중학생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배밭을 하던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아주 귀하게 키웠다. 특히 음식을 무척 가려 먹였다. 이씨는 “자라서 그렇게 먹고 살 수가 없으니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시면은 복암리 고분군, 신광리 고인돌군 등 선사·고대 유적이 증명하듯 영산강 하류의 드넓은 충적평야를 기반으로 일찍부터 상당한 세력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던 지역이다. 옥야천리(沃野千里)라고 자부할 정도로 땅은 기름지고 물산 풍부해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는 증거다. 게다가 바다가 멀지 않으니 음식문화가 발달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1983년 4월 금융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결혼해 광주·순천에서 살다가 2002년 서울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농가와 계약재배한 고급 쌀 고시히카리[越光]를 ‘농비어천가’라는 브랜드로 강남의 한 백화점에 납품하는 사업을 했다. 하루 2000만원어치를 파는 날이 있을 정도로 잘됐다. 그러나 여주·이천 쌀을 취급하는 바이어들이 견제하기 시작했다. 백화점 종업원들을 겁박했다. 중간에서 쩔쩔매는 종업원들을 보니 “저 사람들 앞길 막지 말고 내가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전업했다.

2008년 서초동 서울교대 근처에 연잎밥을 중심으로 하는 한정식집 ‘연잎’을 열었다. 서울에 오니 먹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식점을 선택했다. 연잎과 돼지를 농가와 계약해서 공급받았다. 110평 넓은 식당에는 손님이 많았다. 점심시간에는 정말 바빴다. TV에도 많이 나가고 장사가 잘 됐다. 한 달에 3000만원씩 매상이 올랐으나 비용 부담이 너무 컸다. 한 달 관리비가 400만원, 주차비가 200만원씩 나갔다. 일하고 팔린 만큼 이익이 남지 않았다. 게다가 주5일 근무제(2004년 7월부터 단계적 시행)가 점차 확대되면서 손님이 줄었다. 2년 만에 음식점을 정리했다.

지난 화요일(24일) 오후 8시 무렵의 ‘막걸리이야기’ 내부. 4인 테이블 6개가 꽉 찼다.

지난 화요일(24일) 오후 8시 무렵의 ‘막걸리이야기’ 내부. 4인 테이블 6개가 꽉 찼다.

여주인 전화기에 저장된 단골 전화번호가 1000개쯤 되는데 이름이 아니라 손님을 처음 만난 상황이나 특징으로 등록했다.

여주인 전화기에 저장된 단골 전화번호가 1000개쯤 되는데 이름이 아니라 손님을 처음 만난 상황이나 특징으로 등록했다.

음식점을 할 때 소주 종류를 몰라 손님들이 답답해 할 정도였다. 어느 날 단골 손님이 막걸리 마시는 행사를 했다. 남기고 간 술을 뒀더니 식초가 됐다. 그걸 보고 “아하 이거 살아있는 술이구나. 이걸 파는 장사를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2010년 관악산 등산로 남현동 출발점 입구에 막걸리 집을 인수했다. 정보지 보고 현장 확인도 안 하고 권리금 300만원과 보증금을 보냈다. 4~5평 작은 가게였다. 하산객들 뒤풀이 술집이었다. 등산객들이 보도록 막걸리 산지를 크게 써 붙여놓고 파니까 사람들이 이것저것 찾았다. 찾는 대로 마구 들여놓다가 잘 팔리는 걸 골랐다. 안주를 “재료 그대로 달라” 하던 어떤 독특한 손님이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술을 찾아 처음 ‘송명섭막걸리’를 팔게 됐다.

상마다 마른 휴지와 물휴지를 놓았다. 물휴지를 통째 비치하는 대중음식점은 흔하지 않다.

상마다 마른 휴지와 물휴지를 놓았다. 물휴지를 통째 비치하는 대중음식점은 흔하지 않다.

이 집에서 술을 마셔본 사람들은 그 다음 등산 때 산에 올라가서 먹을 도시락 안주를 많이 찾았다. 식품 즉석가공 허가를 추가로 받았다. 집에서 해주는 것처럼 안주와 간식 도시락을 만들어 팔았다. 토요일에는 아침 1시간에 40만~50만원어치가 팔렸다. 바쁠 때는 아들까지 나와서 일손을 도왔다. 아들이 조리 공부를 하니까 현장실습 삼아 시급을 주고 시켰다. 족발이 많이 팔렸다. 하루는 아들이 “그냥 들고 가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엔 ”그런 생각하면 네 마음에 죄 짓는 거야”라고 타일렀다. 실제로 보니 그냥 들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손님 쌈장 가져가셔야죠”라고 말하면 훔쳐가려다가도 돈을 냈다. 자리를 넓히려고 201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요즘은 자리를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성업 중이고, 막걸리 집 창업하려는 사람에겐 필수 견학코스가 됐다. 단골 중 개업한 사람도 있다. 과천에서 유명한 ‘별주막’이 그 중 하나다.

‘어릴 적 막걸리 심부름할 때 홀짝홀짝 그~막걸리…’라고 막걸리 애호가들의 추억을 일깨우는 글이 벽과 창문에 씌어있다.

‘어릴 적 막걸리 심부름할 때 홀짝홀짝 그~막걸리…’라고 막걸리 애호가들의 추억을 일깨우는 글이 벽과 창문에 씌어있다.

유리창과 벽에 여주인이 손수 써 붙인 “먼저 드세요” 표어. 상대에게 먹어보라는 말도 않고 먼저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면 지적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써 붙였다.

유리창과 벽에 여주인이 손수 써 붙인 “먼저 드세요” 표어. 상대에게 먹어보라는 말도 않고 먼저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면 지적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써 붙였다.

어느 날 요식업중앙회장이 와서 “애로사항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음식점 창업교육 할 때 화학조미료 넣지 말라는 내용 좀 가르치라”고 했다. 그러자 “그래도 좀 넣어야 한다”고 하기에 “그럼 우리 집에 왜 오셨어요”라고 쏴줬다. 이씨는 “음식점이 불경기라고 하는데 경기 탓이 아니라 음식 하는 사람 탓이 더 크다. 화학조미료에만 의존해서 맛내다 보니까 그런 거다. 쉽게 음식 해서 돈 벌려는 게으름 때문이다. 일찍 음식점에 나가서 김치 담그고 제대로 직접 음식 만들면 손님은 온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하다가 안 되면 말지 하는 생각으로 투신했는데 해보니 정말 재미있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좌석은 4인 테이블 6개. 문 여는 시간 오후 6~10시(주말 오후 3~8시). 달력의 빨간 날은 모두 쉰다. 이번 설에도 연휴 나흘 모두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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