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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를 내버려 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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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불법적 국정 농단이 알려지며 촛불이 광장을 환하게 밝혔다. 국민의 목소리를 담은 촛불은 정의감이라는 보편적 윤리의식을 연료로 사용하였기에 더 밝게 타오를 수 있었다.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분노가 공감되면서 세대를 넘어, 정치적 성향을 넘어 수십만의 인파가 광장에서 촛불을 함께 들 수 있었고, 정의에 대한 공통의 열망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탄핵이 보수와 진보의 소모적 대립에 빠지지 않아야
사법부, 완전하지 않지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국정 농단의 조사 과정에서 청와대에 뿌리를 둔 국정 농단이 사방으로 가지를 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화여자대학교의 입시 과정 비리, 재벌들과의 은밀한 거래,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 등이 알려지면서, 교육계·경제계·문화계가 온통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촛불로 상징되는 저항은 이념적 성격을 띠기 십상이다. 소위 블랙리스트는 보수 세력이 진보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저항은 불가피하게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을 끌어들이게 된다. 재벌의 뇌물 스캔들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보수 대 진보의 틀을 끌어들인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표면적으로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국정교과서 문제까지 더불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보수를 자부했던 세력들의 비리가 드러남에 따라 진보의 가치를 주창한 세력이 힘을 얻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 움직임이 형성됐다. 이번을 계기로 보수 세력은 가치 있는 보수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좋은 일이다. 정경유착이라는 친재벌적 보수 세력의 고질적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가 될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쁠 것이 없다. 보수는 개선되고, 진보가 힘을 얻어 장점이 조화롭게 유입되면 우리 사회는 더욱 성숙한 모습을 갖추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조화로운 발전으로 가는 길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국정 농단 사태에는 도덕적 정의의 차원과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차원이 결합돼 있어 상황이 미묘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성향은 쉽게 변화하지 않아 하루아침에 보수적인 사람이 진보적이 되지 않고, 진보적인 사람이 보수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적인 이유에서 촛불을 들었던 보수는 촛불에 이념적 색채가 가미되면서 발길을 멈칫하고 침묵하던 보수 세력은 태극기를 들고 나온다. 요즈음 정의감을 토대로 단합됐던 국민이 분열되는 위험신호가 탐지되는 이유다.

국정 농단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를 도덕적인 민주사회로 발전시키면서도 보수와 진보의 소모적 대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한 첫 단추가 잘 끼워지기 위해서는 대통령 탄핵 사안이 큰 갈등 없이 마무리돼야 한다. 탄핵 사안을 다음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는 정치에 이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반성과 숙려가 필요한 시기에 난파선에서 서로를 헐뜯고, “예쁜 여동생” 운운하며, 국회 의원회관에 대통령을 풍자하는 나체화를 걸어 정치 쇼를 하는 정치인들은 거부감과 갈등을 조장할 뿐이다. 엘리트 관료들로 채워진 행정부는 지금까지 한국의 발전을 주도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나, 정권 교체 시기인 지금 갈등을 예방하거나 해소하는 데에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사법부다. 사법부도 완전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최선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채워 가며, 격려하며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촛불시위는 준법의 틀 내에서 절제하며 진행됐기에 호소력이 있었음을 잊지 말자. 『법의 정신』의 저자 몽테스키외는 "덕성이 소멸되면, 법에 의해 자유로웠으나, 법에 대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규범이던 것을 가혹함이라 부르고, 규칙이던 것을 제약이라 부른다”고 말한다. 보수 세력이든 진보 세력이든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위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견해와 다른 판결을 내린 재판관의 신상을 털고 인신을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법부마저 정치판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혼돈의 나락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법부를 내버려 두라.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약력 : 서울대 졸 , 미 애리조나대 철학박사, 서울대 교무처장, 『철학적 분석』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