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돈 쓰는 방향이 달랐다…지리차는 ‘볼보’를, 현대차는 ‘땅’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 ‘뱀이 코끼리를 삼켰다.’ 2010년 8월 중국 자동차업체 지리(吉利)자동차(이하 지리차)가 스웨덴 자동차 기업인 볼보를 인수했을 때 중국에서 보도된 기사 제목이다. 매출 규모로 볼 때 볼보가 20배 더 컸다. 지리차가 지불한 돈은 18억 달러(2조1000억원). 지리차는 더 큰 금액을 써낼 용의도 있었다.

#2 2014년 9월 12일 한국 재계가 술렁였다. 한국전력이 삼성동 본사 사옥 부지 매입자로 현대자동차 그룹(이하 현대차)을 발표했다. 술렁인 이유는 바로 ‘가격’. 한전이 제시한 예상입찰가(3조4000억원)의 3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이었다. 현대차 그룹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 25조원의 40%나 되는 규모였다. 터무니없이 높게 써냈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국과 중국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두 자동차 기업의 행보는 그렇게 엇갈렸다. 한 회사는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웨덴 기업 볼보를 인수했고, 다른 한 회사는 볼보 인수가의 5배에 육박하는 금액에 강남 땅을 사들였다. 투자 목적은 같다. ‘글로벌화’다. 지리차는 볼보가 가진 브랜드와 각종 첨단 기술이 필요했다. 현대차는 서울 삼성동에 들어설 글로벌비즈니스센터(이하 GBC)에 거는 기대가 컸다. 독일의 폴크스바겐 아우토슈타트와 BMW 벨트처럼 ‘글로벌화’ 전략의 콘트롤타워로 삼겠다는 의지다.

글로벌화를 위한 두 기업의 미래 전략에는 꽤 차이가 있어 보인다. 지리차는 ‘질 낮고 싼’ 이미지를 바꾸고자 브랜드 파워와 기술을 가진 글로벌 기업을 샀다. 반면 현대차는 수직 계열화와 내부역량 강화에 힘쓰는 모양새다. 현대모비스(자동차부품), 현대파워텍(변속기), 글로비스(물류)까지 분야별 자회사 등을 모두 갖췄다. GBC는 그 상징이다.

한국투자증권 최설화 애널리스트는 “지리차는 과거 중국 로컬 업체 중에서도 하류 업체였다”며 “볼보나 호주 DSI(변속기 업체) 등 해외 선진기업을 인수하면서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수 아래라고 봤던 중국 지리차. 현대차는 생각보다 더 빨리 글로벌 시장에서 맞닥뜨리게 됐다. 리수푸(李書福) 지리차 회장(53)가 적극적으로 글로벌 기업 인수에 나선 덕분이다.
리수푸 회장의 볼보 인수 8년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글로벌 기업과의 ‘격차’부터 인정했다. 지리차는 저가 차량을 주로 생산해 안전과 배출 기준이 낮은 국가로 수출했다. 강력한 브랜드와 기술이 필요했다. 규제·문화·지적재산권 등 돈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2008년 볼보가 리 회장의 눈에 들어왔다. 세계 금융위기, 막대한 적자를 내는 볼보는 포드에 큰 ‘골칫거리’였던 것. 당시 포드는 해외 럭셔리 라인을 정리하며 볼보를 경매에 부쳤다. 같은 시기 포드 자회사인 랜드로버와 재규어도 인도의 타타모터스에 넘어갔다.

볼보를 인수한 뒤 리수푸 회장은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다. 생산 라인전체를 바꾸고, 소형차 라인업도 늘렸다. 출시 후 10년간 변화가 없었던 볼보의 주력 SUV 모델 ‘XC90’도 완전히 새로운 모델로 출시했다. 아우디 ‘Q5’나 BMW ‘X5’, BENZ ‘ML’을 잡겠다는 대담한 전략도 세웠다.강력한 글로벌 유통망도 거머쥐었다. 볼보는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와 지역에 약 2400개의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 90%가 유럽과 북미에 집중돼 있다.

중국 자동차 산업에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쑤요우산(蘇友珊) 대만사범대학 교수는 “타깃이 다른 두 자동차 브랜드가 손잡고 세계 자동차 시장 경쟁에 뛰어든 사례”라고 평가했다.
볼보는 내친김에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대한 투자도 늘리고 있다. 2019년 중국과 유럽에 첫 번째 전기차 모델을 내놓을 생각이다. 볼보 최고급 세단인 ‘S90’으로 벤츠·BMW와 중국 고급차 시장에서 맞붙겠다는 계획이다. 1986년 쩌장(浙江)성 황옌의 초가집에서 냉장고 공장으로 출발한 지리차는 ‘서민 자동차’ 이미지에서 벗어나 ‘프리미엄 자동차’를 전략 타깃으로 삼고 있다.

현대차를 보자. 현대차 역시 ‘글로벌 자동차 기업’ 입지 다지기에 나섰다. 지리차와는 달리 내부 품질 경쟁력 확보와 자체 연구개발에 주력한 것. 자체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 출범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고급 브랜드 출범에 맞춰 연구개발 투자도 늘렸다.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는 2016년에만 1조원 넘게 연구개발에 쏟아부었다. 친환경차·자율주행차·전기차·수소차 개발까지 범위와 영역을 한껏 넓혔다. 브랜드·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드러난 셈이다.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 입찰을 10조5500억원에 따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5년 7월 GBC 공사 현장을 찾은 정몽구 회장은 “GBC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새로운 100년의 상징이자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인력·기술·인프라를 GBC로 모으겠다는 것이다.

자 이제 두 회사 글로벌 전략을 중간평가해보자. 지리차가 볼보를 인수한 지 6년이 지난 지금. 볼보는 다시 살아났다. 2013년부터 수익성이 좋아졌다. 2016년 1분기 영업이익은 31억 크로나(4080억원), 순이익률도 2014년보다 5배 가까이 증가한 7.5%를 기록했다.

모회사인 지리차도 순항 중이다. 주가가 1년 새 176% 급등했다. 홍콩 증시에 상장된 지리차의 주가는 지난해 1월 25일 종가기준 3.38 홍콩달러에서 지난 23일 9.33 홍콩달러로 1년 새 두 배를 훌쩍 넘어섰다. 탄탄한 실적 덕분이다. 지리차의 작년 판매량은 76만 대. 50% 넘게 더 팔렸다. 중국 내 점유율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현대차에 대한 시장의 시선은 ‘우려’ 쪽에 가깝다. 2013년 6월 26만원을 넘어섰던 주가는 지난 20일(종가기준) 15만원대에 머물고 있다. 57%나 빠졌다. 시가총액은 30조원 가까이 날아갔다. 중국 내 현대차 판매량도 점차 줄고 있다. 중국 자동차 전문사이트 이처(易車)에 따르면 지난해 1월~10월 중국산 브랜드 자동차 판매량이 전년보다 20% 늘어난 813만 대를 기록했다. 중국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42.6%에 해당한다. 중국산 브랜드 자동차 기술이나 성능이 좋아지면서 한국산 자동차 특히 현대차는 가격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GBC공사 비용도 걱정이다.

여의도 증권업계도 지리차의 ‘글로벌화’에 더 주목하고 있다. 증권사 자동차 담당 한 애널리스트는 “지리차의 볼보 인수는 현대차를 ‘벤치마킹’한 결과”라며 “유럽차를 벤치마킹한 뒤 한국차 가격에 맞춘다는 전략일 것"이라고 했다. 실제 지리차의 보루이(博瑞)자동차도 렉서스 ‘ES’와 아우디 ‘A6L’ 모델을 벤치마킹해 절반 수준인 13만 위안(2200만원)에 판매했다.
지리차와 현대차의 엇갈린 글로벌화 전략, ‘주가’는 벌써 지리차 편에 선 듯하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