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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아이와 친정 엄마에게 늘 미안…난 왜 이 모양이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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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혼자 모든 걸 떠안고 자신을 혹사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고 웃어야
미안해야 할 대상은 오직 자신뿐

아이가 이제야 카시트에서 겨우 잠들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민정씨는 마음이 급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이의 열은 며칠 째 내리지 않는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하루 종일 맥을 못 추고 있다는 선생님의 문자를 받았다. 문자에 담긴 의미는 분명하다. 이 정도면 유치원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그런데 아이를 집에 둘 방법이 없다. 요즘 직장에선 감사가 진행 중이다. 연가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참 후에야 돌아온 답은 예상대로였다. “힘들어.” 남편에게 이런 문제는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저 힘들다고 한 마디 남기면 그뿐. 감당과 책임은 오직 민정씨에게 있다. 그래도 몇 번 싫은 소리를 했더니 한 마디 덧붙이긴 했다. “미안해.” 정말 그는 미안한 걸까?

결국 답은 친정뿐이다. 가깝지도 않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도 엄마는 내 아쉬운 소리를 들어준다.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엄마 처지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아이는 유치원에 갈 수 없고, 민정씨가 데리고 있을 형편도 아니다. 주말까지 다른 누군가가 돌봐야 한다. 그래서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데리고 민정씨는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다. 이렇게 갔다 돌아오면 새벽일 것이다.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내일을 시작해야 한다.

민정씨 입에 습관처럼 매달린 말이 있다. “미안해요.” 오늘만 해도 친정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아이를 데리러 간 유치원에서도 선생님에게 고맙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 자료 준비를 위해 야근을 하는 팀원들에게도 미안했다. 다들 걱정 말라고 하지만 민폐가 된 느낌이다. 내가 못한 것은 나머지 사람들이 수고해야 한다.

일하는 엄마의 직장 생활은 미안하다는 인사의 연속이다. 일찍 퇴근해야 하는 상황도 있고, 아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내는 연월차도 적잖다. 이런 불안정성 때문에 시간이 많이 드는 업무, 윗선의 관심이 큰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떨어지기 마련이다. 동료들은 특별히 티를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을 떠맡은 후 한숨짓는 표정을 보자면 마음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내가 일을 계속하는 것이 맞나 싶다. 어차피 인사 고과에서 낮은 등급은 민정씨의 차지일 텐데 불평할 수도 없다. 미안해해야 할 뿐이다.

그래도 역시 가장 미안한 대상은 아이다. 이 아이는 하필 내게 태어나서 이 고생일까. 다른 아이들이 집에 돌아간 후에도 적잖은 시간을 유치원에서 더 보내야 하고, 열이 나는 날에도 유치원에 가야하고,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사랑을 표현할 시간도 없다. 사랑을 표현하면 아이가 더 매달릴까봐 아침이면 일부러 차갑게 대한다. 아이는 늘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민정씨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진다. 혹시 내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을 고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민정씨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왜 자식은 낳아가지고 이렇게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걸까 싶다. 남들은 이런 와중에도 요령 있게 잘만 키우던데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할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잘하려고 애쓴다. 퇴근하면 집안일은 미루고 우선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집안일은 아이가 자고 나서 챙기려 한다. 주말이면 아이에게 못해준 것을 채워주려고 애쓴다. 다른 아이들은 평일에 체험활동을 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사람이 많은 주말에 돌아다녀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 또 미안해진다.

미안한 민정씨가 스스로를 챙기기란 어렵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정신도 자꾸 깜빡깜빡 한다. 가끔은 이러다 뭔 일이 나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하지만 자기 몸을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해야 할 일부터 우선 제대로 해내야 한다. 내 몫은 내가 제대로 해내야 한다. 자기 몫도 제대로 못하면서 뭔 불평을 할 수 있나?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나는 얼마든지 더 잘 해낼 수 있다. 물론 안 되는 것도 있겠지만, 일단 내가 할 것은 최선을 다해 노력한 다음 불평도 하고 포기도 해야 한다. 일도 더 잘 하고, 아이도 더 잘 키울 수 있다. 민정씨는 늘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게 최선이니? 고작 이렇게 밖에 못하는 거야? 더 잘 할 수 있잖아. 좀 제대로 해보자.’

책임감이 높은 민정씨. 너무나 열심히 사는 민정씨. 그의 삶이 해피엔딩이길 바란다. 하지만 민정씨를 기다리는 삶이 해피엔딩이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그가 그렇듯 앞으로의 그도 노력은 노력대로 하며 또 스스로를 원망할 것이다. 주변에 미안해하며 자신을 채근할 것이다. 그래도 결과가 안 나올 테니 또 실망하고, 또 고민할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자신을 혹사시키고, 정서적으로 학대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학대당하는 그는 의지할 곳이 없다. 자신마저 자기편이 아니니 누가 그의 편이 되어줄까? 누군가 그의 편이 되어주려고 해도 그는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면서 뿌리칠지 모른다.

아이만큼은 민정씨의 편이 되어줄까?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하며 키운 아이만큼은 엄마의 노고를 알아줄까?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다. 아이들은 원래 사랑의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 지불한다고 해도 불공정하다. 자신이 받은 사랑의 아주 적은 부분만 되갚을 뿐이다. 그때도 민정씨는 여전히 아이에게 미안할까? 내가 충분히 주지 못해 아이가 이 모양이라고 생각할까? 그러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만약 지불한 값이 억울하다면 아이에게 벗을 수 없는 굴레를 씌울지도 모른다. ‘너 때문에 엄마는 힘든 삶을 살았어. 너도 누군가를 위해 힘든 삶을 감당해야 해. 그게 인생이야.’

민정씨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지려 한다. 억울해 할 일을 미안해하고, 더불어 해결책을 찾아야 할 상황에서도 혼자 감당하려 한다. 감당하지 못하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더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자신을 위해 남을 학대해선 안 되듯이 남을 위해서 자신을 학대해서도 안 된다. 원망할 일은 원망해야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고 웃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다 나의 책임은 아니다. 누군가 규칙을 잘못 정해 내게 과도하게 배정된 일일 수 있다.

민정씨는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민정씨는 놓치고 있다.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책임지고 아낄 줄 모른다면 그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너무나 힘들게 버텨가는 민정씨가 미안해야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자기 자신 뿐이다.

『내 눈 안의 너』

프랑스의 주목받는 젊은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2009년 작품.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주관적인 시선에 담긴 여자의 모습을 그렸다. 막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의 설렘과 청춘의 풋풋한 단면이 잘 드러나 있다. 옆의 삽화는 이 책의 일부분이다.  미메시스, 1만4800원.

서천석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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