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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을 정규직 사다리로 … 전환 많이 한 기업에 세제 혜택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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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민생을 살리자] 청년 ‘실신(실업·신용불량) 시대’ <하>

‘교통비와 급여 없음. 자원봉사활동 증명서 발급하지 않음’.

열정페이 강요당하는 고단한 20대
취업 필수가 된 인턴, 기업 악용 많아
‘교통비·급여 없음’ 대놓고 광고도
정부, 근로 형태 등 실태 파악 시급

지난해 12월 27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내용의 독특한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제26회 서울가요대상’ 조직위원회가 행사 스태프를 모집한다며 낸 것이다. 심지어 ‘업무에 따라 공연 관람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대학생 윤다혜(24)씨는 “돈도 안 주고, 봉사활동도 아니고, 혹 공연을 못 볼 수도 있지만 아이돌 가수를 보고 싶다면 공짜로 일하라는 의미”라며 “이건 ‘열정페이’도 아니고 그냥 착취”라고 말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후원사인 서울시도 후원 철회를 통보했다.

뜨거워서 더 차갑게 느껴지는 열정페이. ‘청년 실신(실업+신용불량)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20대의 고단함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열정’과 ‘급여(Pay)’를 조합한 열정페이는 ‘돈보다 열정이 중요한 것 아니냐’며 무보수 또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으로 노동을 강요하는 걸 말한다.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4년 말부터다. 한 유명 디자이너가 견습생에게 한 달에 10만~30만원의 급여를 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정된 인턴 자리, 취준생 경쟁 치열

한번 문제가 불거지자 곳곳에서 제보가 속출했다. ‘별도의 급여는 없고 식대로 월 30만원을 지급한다’고 공고를 낸 명품 회사가 있었다. ‘현장 실습 성적에 따른 합격’을 전제로 신입사원을 뽑은 한 소셜커머스 업체는 실습 후 전원을 탈락시키기도 했다. 2주간의 실습을 마친 지원자가 받은 건 합격증이 아닌 지폐 몇 장이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고용노동부가 특별 근로 감독에 나서기도 했다. 현실은 2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고용부가 인턴·현장실습생이 일하는 500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근로 감독한 결과 81곳(16.2%)에서 열정페이를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514명의 청년이 16억7500만원의 임금을 떼였다. 정지원 고용부 근로기준정책관은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거나 임금 지급을 상습적으로 위반하는 기업을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열정페이는 감독만으로 근절될 문제가 아니다. 김이경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말도 안 되는 돈을 받더라도 단기간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공급(학생)이 있고, 그런 청년의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쓰려는 수요(기업)가 있는 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직업훈련에 대한 사회적 합의, 채용 시스템 개혁 등 고차원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열정페이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인턴=필수’라는 최근의 채용 트렌드를 짚어봐야 한다. 유한성(30·가명)씨는 면접에서 ‘학교 다니는 동안 별 활동을 안 했네요?’라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김씨는 “학점과 영어 성적이 나쁘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도 했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인턴이나 어학연수 경험 등을 묻는 것”이라며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이 없었는데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최근 기업의 신입 채용 시스템은 공채에서 수시채용(직무별 채용)으로 바뀌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에 따르면 전국 377개 기업 중 36.1%가 앞으로 “직무별 채용 비중을 확대”하거나 “완전한 직무별 채용으로 진행하겠다”고 응답했다. 신입 을 대거 뽑아 훈련을 시킨 뒤 직무를 정해주는 공채 대신 애초에 직무별로 맞춤형 인재를 뽑겠다는 의미다. 과잉 스펙, 학벌 줄 세우기 등 공채의 부작용이 심각해진 것도 변화의 요인이다.

차비 몇 푼 받고 쫓겨나는 경우 많아

상황이 바뀌면서 취준생(취업준비생)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직무별 채용에서 지원자가 내세울 건 전공 능력이나 관련 실무 경험(인턴)뿐이다. 기업이 ‘즉시 전력감’을 원하면 지원자도 자신이 그런 인재임을 어필해야 한다. 한정된 인턴 자리를 놓고 취준생 간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준호(28·가명)씨는 지난해 초 한 대기업 인턴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정규직 전환 가능’. 이 문구 하나가 그를 들뜨게 했다.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어요. 집에 가라고 해도 안 갔어요. 온갖 잡일에 수시로 내라는 아이디어까지 쉴 틈 없이 뛰었고 ‘일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죠.” 그러나 3개월 뒤 그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는 “나는 월급(약 120만원)이라도 받았지만 월급은커녕 차비 몇 푼 받고 쫓겨나는 인턴이 부지기수”라며 “인턴은 그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탕 신세”라고 말했다.

잡코리아 에 따르면 취준생의 57.2%(복수응답)가 ‘열정페이를 견뎌야 하는 이유’로 취업난을 꼽았다. 열정페이는 단순히 돈을 적게 주는 착취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무급도 괜찮고, 야근까지 하겠다 는 건 정규직 취업이란 최종 목표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사탕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인턴’이 ‘정규직’으로 가는 사다리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 직업훈련 비용 분담 차원에서 접근을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 공채 시스템은 오랫동안 계층 간 이동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며 “써보고 채용하는 선진적 채용 문화를 확산시키려면 인턴이 스펙을 쌓는 수단이 아니라 입직(入職) 절차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은 완성된 인재를 원하지만 대학은 현장형 인재를 길러낼 여력이 없다”며 “당장은 기업이 직업훈련 부담을 나눠 지는 차원에서 정규직 전환형 인턴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정부가 사후 대처(근로 감독)만 할 게 아니라 환경 변화를 더 적극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인턴’은 정확한 정의가 없다. 법률 용어도 아니다. 근로계약 체결 전 시험 고용을 뜻하는 ‘시용(試用)’이나 채용 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습(修習)’ 등과 의미는 비슷하지만 차이가 크다. 고용부는 ‘ 교육 또는 훈련을 목적으로 사업장에서 일(업무)을 경험하는 자’를 ‘일·경험 수련생’으로 통칭한다. 일·경험 수련생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상 근로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근로자로 볼 수 있다’는 게 고용부의 입장이다. 취업을 꿈꾸는 청년 중 상당수가 ‘근로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어설픈 경계인으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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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태 파악도 시급하다. 얼마나 많은 인턴이 있고, 근로 형태가 어떤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이 때문에 기업이 인턴 고용과 정규직 전환 여부 등을 관할기관에 정기적으로 알리는 ‘인턴신고제’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있다. 인턴을 뽑아 정규직 전환을 많이 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면 동참하는 기업이 늘 것이란 논리다. 그러나 이렇게 강제하면 기업이 아예 인턴 채용을 꺼릴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박진 교수는 “어떤 형태로든 인턴을 취업 등용문으로 잘 활용하는 기업은 어디인지, 열정페이로 몇 개월 부려먹다가 쫓아내는 기업은 어디인지 정보가 공개돼야 한다. 그래야 학생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인재를 유치하려는 기업 간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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