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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취임사 5대 키워드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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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트럼프 시대 개막

20일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사는 파격을 넘어 경악이었다. 생방송을 진행하던 CNN의 간판 앵커 제이크 테퍼는 “미 역사상 가장 과격한 취임사”라고 흥분했다. 16분30초. 트럼프는 ‘우리’란 의미의 We를 47번, Our를 48번 썼다.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Will’도 40번 사용했다. ‘미국’과 ‘미국인’이란 단어도 각각 18회, 16회. ‘보호하다’를 뜻하는 ‘protect’는 역대 대통령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7차례나 썼다. 과거 대통령이 자주 썼던 ‘자유(liberty)’ ‘정의(justice)’ ‘평화(peace)’와 같은 단어는 아예 사라졌다. 대신 일찍이 없던 ‘살육(carnage)’ ‘고갈(depletion)’ ‘황폐(disrepair)’와 같은 단어가 등장했다. 취임사의 키워드 5개 골라 그 배경과 숨겨진 뜻을 분석했다.

1 보호무역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트럼프 대통령(왼쪽). [AP=뉴시스]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트럼프 대통령(왼쪽). [AP=뉴시스]

우리는 우리의 제품을 만들고, 우리의 기업을 훔치고, 우리의 일자리를 파괴하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우리 국경을 지켜야 합니다.

We 47번, Our 48번, Will 40번
자유·정의·평화 1번도 안 써
“미 역사상 가장 과격한 취임사”

We must protect our borders from the ravages of other countries making our products, stealing our companies, and destroying our jobs.

공화당은 원래 자유무역주의를 옹호했다. 그런데 바뀌었다. 지난주 퓨리서치가 발표한 공화당 지지자들의 성향 조사 결과 “자유무역은 잃는 게 많다”고 응답한 이가 60%로 민주당(49%)보다 높았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은 69%에 달했다. 민주당 정권 8년을 거치며 내향적으로 바뀐 것이다. 트럼프는 이를 읽었다. 하지만 폴리티코는 “제조업 일자리가 준 것은 자동화 때문인데 초점을 흐렸다”면서도 “결국 이 문장을 볼 때 트럼프는 무역전쟁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 같다”고 전망했다. 모건스탠리는 “중국을 비롯해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일본 등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전망했다.

2 새로운 동맹

우리는 낡은 동맹을 강화하고 새로운 동맹을 형성할 것입니다.

또 급진적인 이슬람 테러리즘을 지구상에서 뿌리 뽑아 세계를 개혁할 것입니다.

We will reinforce old alliances and form new ones and reform the world against radical Islamic terrorism which we will eradicate from the face of the Earth.

병 주고 약 주겠다는 메시지다. 동맹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잘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동맹을 바꿔 탈 수 있다”는 경고를 던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 와 한국·일본을 겨냥한 대목이다. 워싱턴포스트 는 “이 문장은 트럼프가 ‘(국제 문제)개입 반대’ 입장을 강하게 내비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에 나가 있는 미군의 규모를 대폭 줄이고 그 대신 자국 내 군사력을 증강하겠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성에 안 찰 경우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거론될 공산도 있다.

3 국민의 정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느냐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국민이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느냐입니다.

What truly matters is not which party controls our government,

but whether our government is controlled by the people.

트럼프가 “난 공화당원도 민주당원도 아닌 국민 편이라고 선언한 것”(폴리티코)과 같다. 현재 미국의 모든 문제는 이 두 정당 때문에 생긴 것이며 자신이 그것을 뜯어고치려 온 백기사라는 주장이다. WP의 21일자 1면 톱 사진은 트럼프가 이 취임사를 읽을 때 뒤에 앉아 있던 공화당 1인자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었다. 현재는 납작 엎드려 있지만 불쾌한 공화당 주류 세력의 반격이 언제 시작될 지 주목된다.

4 암울한 미국

어머니와 아이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녹슨 공장들이 곳곳에 묘비처럼 널려 있습니다. 교육 제도는 돈만 퍼부을 뿐 우리의 젊고 아름다운 학생들에게 지식을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Mothers and children trapped in poverty in our inner cities; rusted-out factories scattered like tombstones across the landscape of our nation; an education system, flush with cash, but which leaves our young and beautiful students deprived of knowledge.

미 언론들이 “미국 사회를 암울한 디스토피아(유토피아 반대어)의 도살장으로 묘사했다”고 맹렬히 반박한 대목이다. USA투데이는 “지금 미 경제는 회복됐고 실업률과 범죄율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 문장은 8년 전 오바마 취임사와 대조된다. 극심한 금융위기에 놓였던 당시 오바마는 ‘도전과 희망’이란 낙관적 표현을 썼는데, 경제 호황인 지금 트럼프는 “현 상황은 암흑”이라고 했다. 오바마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돌입하기 위한 명분 쌓기로 보인다.

5 오직 미래

20일 대통령 취임식 후 떠나는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를 배웅하는 트럼프 대통령 부부. [로이터=뉴스1]

20일 대통령 취임식 후 떠나는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를 배웅하는 트럼프 대통령 부부. [로이터=뉴스1]

이제 우리는 오직 미래만을 바라봅니다.

Now we are looking only to the future.

역대 취임사는 과거의 영광을 강조하고 미래와 연결시키려 했다.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등 역대 대통령을 많이 인용한 이유다. 오바마는 게티스버그(남북전쟁), 노르망디(제2차 세계대전), 케 산(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인의 희생을 거론했다. 하지만 트럼프 취임사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우리는 오직 앞날만을 바라본다”고 강조했다. “난 전혀 새로운 대통령”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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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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