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과 찍어내기가 이뤄낸 ‘자발적 문화융성’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5호 10면


지난 17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뒤 커다란 검정 천막 주변으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0일 개장한 ‘광장극장 블랙텐트’의 개막작 ‘빨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블랙텐트’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반발해 지난해 11월부터 노숙투쟁을 이어 온 연극인들이 정부가 억압한 세월호·위안부 등 약자들의 고통을 대변하겠다며 세운 ?임시 공공극장?이다. 천막극장이라고 말처럼 허술한 건 아니다. 차량 소음과 약간의 냉기를 빼면 일반 소극장과 다를 바 없는 설비에 2월까지 예정된 라인업도 상당한 화제작들이다.


이곳은 연극인과 시민들의 기부 및 모금으로 운영되는 자발적 문화생태계이자 특별한 문화체험 현장이다. 캠핑촌장 송경동 시인이 구해 온 천막에 미술가 이윤엽이 그림을 그렸고 해고 노동자들도 설치에 힘을 보탰다. 티켓 판매를 하지 않지만 ‘시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극장’이라는 취지에 관객들은 기꺼이 모금으로 동참하고 있다. 110여 객석은 연일 만석인데 중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캠핑촌 상주자나 시위 참가자 등 평소 연극팬이 아닌 이들이 처음 연극을 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평에서 중학생 제자 3명을 인솔해 온 논술교사 김모씨는 “아이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역사적 현장을 체험시키려 데려왔다”고 했다. 극장 앞에서 만난 이해성 극장장과 임인자 운영위원은 “캠핑촌 분들도 리허설을 도우며 창작 과정에 참여했다. 예술인과 각 층위 사람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자발적 문화생태계이자 특별한 체험 현장]
국정 농단 비상시국에 공연계는 일찌감치 대동단결했다. 지난해 연말부터 올라온 대다수 공연이 시국 풍자 코드를 강조하고 나섰다. 풍자극의 전형인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를 비롯해 오페라 ‘맥베스’, 연극 ‘실수연발’, 뮤지컬 ‘데스노트’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이게 나라냐” “내가 이러려고” “우주의 기운이” 등 유행어를 활용해 정권을 조롱했다. 16일 개최된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소절 “들어라 썩을 대로 썩은 세상아. 죄악으로 가득하구나. 들어라 비겁하고 악한 자들아. 너희들의 세상은 끝났다”를 불러 환호받기도 했다. 블랙리스트와 검열로 문화·예술계를 억압하려던 정책이 역설적으로 예술의 사회적 발언을 부추긴 셈이다.


그간 주류 예술계는 위축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2015년 국립극장 마당놀이 ‘춘향이 온다’의 경우 공연 취소 압력으로 풍자가 실종됐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풍자로 검열 사태의 단초가 된 연극 ‘개구리’(2013)를 제작한 국립극단도 이후 우리 현실보다 세계 연극 따라잡기로 돌아섰다. 마당놀이 연출가이자 ‘개구리’ 당시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었던 손진책 연출은 “국립의 경우 정부와 예술가의 묵계가 있는 것은 맞다. 표피적인 것보다 큰 싸움을 걸어야 한다”면서도 “나는 ‘개구리’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봤다. 마당놀이는 풍자가 기본 정신인데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며 씁쓸해했다.

[정부 지원 탈락 작품이 주요 상 휩쓸어]
검열 사태는 2015년 서울연극제 아르코예술극장 대관 탈락으로 조용히 시작돼 그해 가을 ‘개구리’ 박근형 연출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지원사업 배제와 국립국악원 공연 취소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찬조연설을 했던 이윤택 연출의 문학창작기금 ‘100점 탈락’,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세월호 연상 팝업시어터 공연 방해, 공연예술 발표공간 지원사업 폐지 등의 사건이 줄줄이 터졌고 연극인들은 릴레이 시위·토론회 개최 등 집단행동에 나섰다.


2016년엔 창작활동을 통한 저항도 두드러졌다. 공간 지원사업 폐지로 운영이 어려워진 게릴라소극장을 내놓고 더 작은 규모인 ‘30스튜디오’로 이전한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연출은 2월 연희단 30주년 간담회에서 “개판의 시대에 깽판으로 저항하겠다”고 선언하며 블랙코미디 ‘방바닥 긁는 남자’를 30주년 개막작으로 올려 권력이 힘으로 주무르는 한국 사회를 차지게 조롱했다. 박근형 연출의 창작산실 탈락작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서울문화재단 제작으로 3월 개막, 국가와 전쟁이라는 거대담론 뒤에 가려진 개인의 아픔을 돌아보는 무대로 호평받으며 동아연극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다.


그 밖에도 사회고발극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해 20여 개 작품에 참여하며 차세대 블루칩으로 떠오른 오세혁 작가의 ‘보도지침’(3~6월)은 5공 시절의 언론사 통제 가이드라인을 소재로 현 정부를 풍자했다. 10월 두산아트센터와 서울시극단에서 동시에 공연을 올렸던 김은성 작가의 통찰도 번득였다. 세월호 참사를 은유한 ‘썬샤인의 전사들’에는 간첩 조작사건 등을 진두지휘하며 역사를 관통한 절대악으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등장하고, ‘줄리엣이 되고 싶었던 햄릿’이란 부제를 단 ‘함익’은 모친이 살해된 트라우마로 약물 중독에 빠져 사랑 한 번 못해 본 채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악마의 속삭임에 의지하는 여자 햄릿을 그려 고도의 패러디를 완성했다.

[정치사회적 의제 표현 형식도 다양해져]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최근 50대 이상의 작가들은 역사를 잘 안 다루지만 40대 전후 젊은 작가들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게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나’를 묻는 작업들이다. 이들이 정치사회적 의제를 표현하는 형식도 다양해졌다.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대학로 22개 극단이 검열에 대한 공론의 장을 이어 간 ‘권리장전 검열각하’ 시리즈는 22개 작품 상당수가 드라마가 아닌 다큐나 토론성 무대였다. ‘블랙텐트’ 라인업에도 포함된 김재엽 연출의 ‘검열 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도 국정감사 녹취록을 재구성한 독특한 형식이었다. 김소연 평론가는 “검열 사태로 연극 전개방식이 다양해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드라마가 약화된 측면도 있지만 작품 양상이 다양해지면서 극장에서 사회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게 자연스러워진 건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사회 풍자는 연극의 본령 중 하나일 뿐이다. 손진책 연출은 “갑자기 연극계가 사회 비판적이 된 건 아니다. 어느 정권에서나 문화계 편가르기 구도는 늘 있어 왔고, 기본적으로 사회에 할 얘기 하는 게 예술가들의 창작정신”이라며 “변화는 정권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정부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줬으면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게 사실 별것 아닌데 비판세력이 있어야 건전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정권을 잡으면 보기 싫은 모양이다. 이 기회에 패러다임이 바뀌어 최순실이 한국 문화계 발전에 톡톡히 역할을 해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Copyright by JoongAng Ilbo Co., Ltd. All Rights Reserved. RSS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