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년 된 세계 첫 바버숍…버킹엄궁 왕자들 머리 다 손질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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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영국 왕실 바버숍 ‘트루핏앤드힐’의 수석 이발사

‘똑 떨어지는 슈트에 윤이 반짝반짝 나는 코가 뾰족한 구두, 그리고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정리된 머릿결’. 스파이 영화 ‘킹스맨’에 등장한 영국 신사의 모습이다. 영국 신사는 결코 너무 튀거나 파격을 주지 않는다. 영국 런던의 대표적인 남성 명품거리로 꼽히는 ‘세인트 제임스’ 거리에 있는 가게들에선 이런 모습의 남성들이 흔히 목격되곤 한다.

세인트 제임스 거리에서도 유독 런던 귀족·전문직들, 그리고 세계 부호들의 꾸준한 방문이 이어지는 작은 매장이 있다. 거리 정중앙에 있는 바버숍 ‘트루핏앤드힐(Truefitt and Hill)’이다. 1805년 설립된 기네스 공인 세계 최초 바버숍으로, 212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 로열 패밀리는 물론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루퍼트 머독, 스티브 잡스 등이 트루핏앤드힐의 주요 손님으로 알려져 있다. 윈스턴 처칠 총리,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소설가 찰스 디킨스,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18일 서울 청담동 트루핏앤드힐에서 만난 ‘마스터 바버’ 루크 존 조이스는 “한국에서도 남성들이 휴식과 그루밍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날 것”이라며 바버숍 문화가 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매장은 화장품 구매, 휴식 공간과 위스키바 등을 설치했다. [사진 김현동 기자]

18일 서울 청담동 트루핏앤드힐에서 만난 ‘마스터 바버’ 루크 존 조이스는 “한국에서도 남성들이 휴식과 그루밍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날 것”이라며 바버숍 문화가 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매장은 화장품 구매, 휴식 공간과 위스키바 등을 설치했다. [사진 김현동 기자]

지난 18일 트루핏앤드힐의 이발사 중 가장 높은 직책의 ‘마스터 바버’인 루크 존 조이스(35)를 만났다. 그는 영국 왕실에 출입해 남성 왕족의 커트와 면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면허(로열 워런티)를 갖고 있다. 조이스는 최근 오픈한 서울 청담동 트루핏앤드힐 청담점의 이발사 트레이닝차 입국했다. 다음은 조이스와의 일문일답(괄호 안은 편집자 주).

사우디·카타르·쿠웨이트 왕족도 담당
처칠·히치콕·잡스·머독 등 단골
러시아·중국 고위층서 초청하기도

‘마스터 바버’는 어떤 사람인가.
“쉽게 말하면 ‘이발사들의 사범’이다. 10년 이상 경력의 소속 이발사 중에서 선발한다. 전 세계 트루핏앤드힐 매장을 돌면서 소속 이발사들의 트레이닝을 하고, 영국 본점을 찾는 고객 중에서도 VIP들의 이발과 면도 서비스를 한다.”
당신이 담당하는 VIP는 누가 있나.
“영국 왕실과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쿠웨이트 등의 남성 왕족 이발을 담당한다. 왕정은 아니지만 러시아·중국 등 고위층의 이발도 많이 해준다. 대부분 부호나 VIP들이 영국 방문 일정에 맞춰 예약을 하는데, 때로는 초청을 받아 해당 국가에 가기도 한다.”
버킹엄궁 어디서 이발을 하나. 왕족 중 누가 단골 손님인가.
“버킹엄궁 내에선 이발실이 별실처럼 따로 있다. 이름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왕자들은 다 내가 면도와 머리 손질을 해봤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자.”(그는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 해리 왕자 등 영국 왕족들의 관리를 맡아왔다. 유명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은 트루핏앤드힐에 오기 전 다른 고급 이발관에서 직접 관리해줬다. 개별 왕족이나 VIP에 관한 에피소드는 ‘고객의 프라이버시’라며 공개하길 꺼렸다.)

전동 ‘바리캉’ 안 쓰고 수동만 사용
“이발뿐 아니라 패션·스타일링까지
212년간 여성 손님 한번도 안 받아”

최근에 문을 연 서울 청담동 트루핏앤드힐 매장에서 이발과 면도 시연을 하고 있는 루크 존 조이스.

최근에 문을 연 서울 청담동 트루핏앤드힐 매장에서 이발과 면도 시연을 하고 있는 루크 존 조이스.

‘왕실 이발’은 일반 이발과 뭐가 다른가.
“꼭 왕실 이발이 아니라도 VIP 이발은 각 고객에 알맞은 맞춤형 서비스란 특징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면도나 이발을 하기 전 ‘상담’ 과정이다. 고객은 서비스를 받기 전 라운지에 앉아 담당 이발사와 상담을 진행한다. 머릿결이 직모인지, 두피에 기름기가 많은지 등에 따라 자체 개발한 오일과 로션·크림 등을 사용한다. 전동 클리퍼(속칭 ‘바리캉’)를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손님들이 클래식한 멋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아 가위를 주로 쓰고 마무리는 손으로 움직이는 ‘핸드 클리퍼’를 쓴다. 그 외에 소속 이발사들이 깔끔한 정장과 구두 등을 착용해 호텔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다.”
212년이나 된 바버숍인데, 명성에 비해 본점의 규모가 너무 작은 것 같다. 영국 내 확장은 안 하나.(런던 트루핏앤드힐 본점에는 바버 스테이션(이발하는 좌석) 5곳과 이발사 8명이 있다.)
“오너인 앨런 브로튼은 런던 트루핏앤드힐 본점이 ‘하나뿐인 최고급 바버숍’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 대신 전 세계 확장 전략을 짜고 있다. 서울 외에 뉴욕·베이징·토론토·뉴델리 등에 40여 곳의 매장이 있다. 전 세계 주요 거점 도시에 신규 매장을 늘릴 방침이다. 올해 중 러시아·페루·케냐·사우디아라비아에 매장 오픈 계획이 있다. 각 지점의 매장 콘셉트와 인테리어 등을 구상하고, 소속 이발사들을 트레이닝하는 것은 내 몫이다.”
한 해에 이발사 지원자는 얼마나 되나.
“런던 본점을 기준으로 하면 한 해에 지원자만 2만 명 정도 된다. 하지만 공석이 없다. 지난해 12월 퇴사한 이발사는 만 50년간 근무를 하기도 했다. 선발 기준이나 시험 과목 등은 없지만 선발자나 지원자들이 모두 런던 최고급 바버숍 출신이라 딱 보면 서로 안다.”(서울 등 전 세계 매장은 해당 법인에서 런던 본사와 상의해 이발사를 선발한다.)
본점에 의자가 5개인 이유가 있나.
“19세기만 하더라도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상인·은행가·관료 등 각기 다른 계급이 관례적으로 5개의 다른 의자에 앉던 데서 유래한다. 지금은 물론 고객들이 아무 자리에나 앉는다.”
바버숍에서 자체 개발한 화장품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위생 기술이 부족해서 바버숍에서 알코올로 두피를 소독하는 경우도 많았다. 역한 알코올 냄새를 상쾌하게 바꾸기 위해 꽃향기 등을 첨가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화장품 라인으로 발전했다.”(실제로 트루핏앤드힐의 매출 중 60%를 자체 화장품 판매가 차지한다. 셰이빙크림·향수·샴푸 등 87종의 화장품이 있다. 그중에서도 ‘면도 직전 오일(pre- shave oil, 국내 시판가 5만9000원)’이 가장 인기가 있다. 세안 후 면도크림을 바르기 전에 쓴다. 면도할 피부와 수염을 부드럽게 코팅해 주는 것이 특징이다.)
당신은 미용도 할 줄 아나.
“물론이다. 미용을 모르면 제대로 그루밍(화장·미용 등 남성들이 자신의 몸단장에 신경 쓰는 행위)을 할 수 없다. 나 역시 런던에서 비달사순 미용학교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토니앤드가이 미용학교를 나왔고 마랑고니 패션스쿨에서 공부했다. 단순히 머리만 잘 자르는 것이 아니라 패션과 더불어 최적의 스타일링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한국에서는 미용사는 면도를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국 트루핏앤드힐 소속 이발사들은 미용사와 이용사 자격증 둘 다 보유하고 있다.)

서울·뉴욕 등 세계 40여 곳에 지점
“미용실과 다른 남성만의 공간 필요
런던 바버숍 5만 곳, 한국도 늘 것”

한국에서는 최근 3~4년 사이에 고급 바버숍이 생겨났다. 하지만 아직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남성이 대다수다.
“영국도 10년 전까지는 이발소가 맥을 못 췄다. 하지만 여성들과는 다른, 남성만의 그루밍 공간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바버숍이 늘어나 런던에만 이발소가 5만 곳은 된다. 한국에서도 남성들이 자신을 가꾸고 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바버숍 문화가 확산될 것이다.”(트루핏앤드힐은 청담 매장에 위스키 발베니와 제휴한 바를 설치했다. 성인 남성들이 서비스를 받기 전에 위스키를 한잔하면서 쉴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여성은 바버숍에서 커트를 할 수 없나.
“212년간 한 번도 여성 손님을 받은 적이 없다.”

[S BOX] 프리미엄 바버숍 커트는 4만~7만원, 면도까지 하면 10만원 넘어

그루밍(grooming·여성의 ‘뷰티’에 해당하는 용어로 화장·미용 등 자신의 외모에 투자하는 남자들의 꾸밈 행위) 시장은 연 6~7%대 성장세다. 지난해 그루밍 시장은 글로벌 기준으로 약 25조원(통계사이트 스태티스타 추산), 한국 기준 약 1조3400억원(유로모니터 추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2020년까지 각각 31조원과 1조6000억원 규모로 늘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그중에서도 영국풍의 프리미엄 바버숍은 최근 2~3년 사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있다. 국내에 있는 바버숍은 30여 곳. 한남동, 청담동, 홍대입구, 판교 등에 있다. ‘헤아(Herr)’는 고객의 얼굴형과 체형에 어울리는 스타일링을 제안해 주는 한편 구두 손질을 해주기도 한다. 한남동, 신세계 강남점, 롯데백화점 본점, 포시즌스호텔 등에 지점이 있다.

바버숍의 가격은 대개 커트 기준 4만~7만원대다. 면도와 이발을 다 할 경우 가격은 10만원대를 훌쩍 넘어선다. 반면 동네 미장원에 가서 커트를 하는 가격은 1만~2만원이다. 그런데도 휴식과 꾸밈을 위해 자신에게 투자하는 남성 고객들의 발길이 꾸준한 편이다.

국내에 비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인 트루핏앤드힐 영국 런던 본점의 가격은 생각보다는 비싸지 않은 편이다. 이발과 면도가 각각 45파운드(약 6만5200원)다. 마스터 바버인 조이스는 “비싼 영국 생활 물가를 감안하면 아주 고가는 아닌데, 고정 고객이 대부분이라 가격을 올리기도 쉽지 않다”고 전했다.

글=이현택 기자 mdfh@joongang.co.kr
사진=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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