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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그림자 노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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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시외버스 맨 앞자리에 앉은 어느 날, 기사님의 전화통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그것도 빨리빨리 못 해줘?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집에서 애 키우는 게 일이야?” 기사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승객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사연을 다 들어야 했다. 기사님은 ‘당신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는 밖에서 힘들게 돈을 벌고 있으니, 집에서 놀고 있는 당신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춰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수화기 저편의 아내를 코너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과연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은 ‘일’이 아닐까. 사실 맞벌이 부부가 급증하면서,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부담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업주부들은 ‘돈벌이가 없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육아와 살림에 치이면서도 재취업 걱정에 가슴앓이를 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올인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다그치면서 퇴근하자마자 밀린 살림살이와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시달린다. 바로 이런 ‘대가 없는 노동’이 그림자 노동이다.

살림·육아와 허드렛일 등 ‘대가 없는 노동’ 늘고 있다
그 가치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진정한 리더 필요한 시대

그림자 노동은 살림과 육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렇게 임금을 받지도 못하고, 눈에 띄지도 않는 그림자 노동 때문에 이 사회는 오늘도 묵묵히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셀프 주유, 스팸메일을 일일이 확인하고 지우는 일이나 공인인증서를 설치하는 일, 카페에서 셀프서비스로 자신이 먹은 잔과 쓰레기를 치우는 일, DIY식 가구 조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대가 없이 해내는 모든 일들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개념을 주창한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바로 그 대가 없는 비생산 노동이 현대인의 주체적인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경고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그림자 노동의 가짓수는 늘어나며, 현대인은 보수도 보람도 없는 온갖 잡일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느라 창조적인 사유를 할 겨를이 없어진다. 그림자 노동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자존감을 앗아가지만, 사람들이 그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기에 더욱 교묘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서 크레이그 램버트는 현대인이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온갖 ‘보이지 않는 노동’의 사례를 분석한다. 일정 주기마다 웹사이트의 패스워드를 바꿔줘야 하고, 소프트웨어도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하며, 공항에서 고객이 직접 터치스크린 기계로 탑승수속을 밟게 만드는 기술의 발전 이면에는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려는 기업들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런던의 대형 할인마트에서 한 종업원은 내게 ‘셀프계산대’에서 물품 값을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장기적으로 자신의 일자리를 없애는 방법을 고객들에게 알려주면서, 그 추가적 노동에 대한 대가는 따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자동화 시스템이 늘어갈 때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그림자 노동은 늘어간다. 그림자 노동은 노동의 소외를 가속화시킴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주부의 가사 노동을, 종업원들의 온갖 허드렛일을,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맡아야 할 온갖 비생산적 잡무들을 ‘일 같지도 않은 일’이라고 무시한 적이 있는가. 바로 그 무시와 편견이 그림자 노동에 드리운 차별과 억압을 더욱 공고화하고 있는 것이다. 계산되지 않는 노동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노동의 영역까지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이자 진정한 리더가 아닐까.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에서 바로 이 대가 없는 노동이 우리 삶을 더 복잡하고 더 교묘하게 불능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림자 노동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우리의 자존감을 빼앗고,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앗아감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은밀하게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자 노동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권리, 창조적으로 사유할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 우리는 그림자 노동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스스로의 삶을 빛내는 가치 있는 노동의 주인이 될 권리가 있다.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