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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9

중앙일보

입력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내 손 마디를 벌건 인두로 지지고 있나.

아니다. 미라처럼 손가락엔 헝겊이 감겨있다.

문틈으로 빛이 조금 세 들어왔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혼자였다.

"범구야!!! 범구야!!!!!!!!!!!" 

"뭐, 뭐야 진짜로 그러면 어떡해? 미쳤어? 나는 겁만 주려고..."

"사모님이... 저는 분명히 사모님이 시켜서..."

"우리 범구 어떡해, 범구 어떡해! 의사 불러! 의사 불러주세요!"

잘린 손가락을 집어 들고 오열하던 어머니는, 새벽에 사라졌다. 애 지우는 약을 먹겠다고 약속한 이후였다. 사흘 동안 방안에 처박혀 있던 나는 집사 아저씨의 처가 방문으로 밀어 넣은 주먹밥을 먹고 모조리 게워냈다.
죽이려고 약을 탔나, 이대로 있다가는 송장으로 발견될 것이다. 날개 뜯긴 잠자리처럼, 한참 동안 손가락을 감싸 쥐고 방안을 빙빙 돌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틀 뒤, 낯선 여자가 땀에 젖은 축축한 베개와 이불을 갈아주러 들어왔다. 새로 일하러 온 체구가 작은 아주머니였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지 열흘이 지났다. 열흘 만에 대체가 가능한 사람이 이 집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뱃속에 든 주인 할아범의 아이는 몇 달이나 되었을까. 두 달? 석 달? 그 사실을 내가 먼저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뱃속에는 살을 태울만 한 폭언들이 용암처럼 끓어 갔다. 곪아 터진 진물이 손가락에서 계속 흘렀다.

음흉한 늙은이의 허연 뱃살을 식칼로 찌르는 상상을 했다. 돼지같이 불어터진 늙은 할머니 가죽을 벗겨 마당에 널었다. 햇빛이 따가웠던 날 성기 위에서 눈깔이 뒤집힌 이모의 목을 졸랐다. 집사가 잠이 들면 두 부부의 목을 도끼로 내리쳤다. 꿈이었다.

손가락이 잘린 며칠 동안, 방안이 햇살로 가득했고 내려다보며 이마를 쓰다듬는 어머니가 보였다. 후레자식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빗자루를 들고 어미 노루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다시 어둠뿐이었다. 혼자였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차분했다.

여자 둘이 싸웠다.
이유는 한 남자와 뱃속에 든 아기.
모두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내 손가락이 왜 잘린 걸까.
나는 누구랑 싸웠나.

연화 년이다.
그년이 내 손가락을 잘랐다.

검은 밤은 매일 찾아온다. 오늘 밤, 내일 밤, 올 것이다. 어머니가 늙은이에게 능욕당했던 어두운 밤에 연화 년을 죽여버리고 이 집을 불태워버리는 계획을 세웠다. 뜨거운 여름에 뜨거운 불길 속에서 집이 모조리 타들어 갈 생각을 하니 분노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문 바깥쪽엔 빗장을 채워 살 타는 냄새를 맡아볼 작정이었다.

팔과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개미를 짓이길 기운조차 없었다. 목표가 생겼으니 기운을 차려야 했다. 발을 헛디디다 겨우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식은 불고기와 잡채가 있었다. 밥솥에는 밥이 충분했다. 불고기와 잡채를 옆에 두고 솥 채 퍼먹기 시작했다. 굶은 사자가 싱싱한 근육을 파먹듯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었다. 심장에 야수 한 마리가 날뛰고 있는 듯 맥이 빠르게 뛰었다.

밥솥의 밥이 거의 사라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도마 옆에 서늘하게 놓여있는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살핀 뒤 칼을 옆구리에 숨기고 방으로 건너왔다. 오랜만에 음식을 삼킨 탓에 구토가 밀려왔지만 참았다. 기운이 없으면 계획을 실행할 수 없다. 날이 어두워지기만 기다렸다.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조용했지만, 곳간의 살찐 쥐처럼 파렴치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모든 것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문을 열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복도를 지나 툇마루 끝에 놓여있는 운동화를 신었다. 며칠 비가 왔던 탓에 신발은 축축했다. 아무도 내 신발을 처마 밑으로 옮겨두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나를 비웃는 듯한 꽃들이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들쑥날쑥 미친년이 웃고 있다. 달빛에 비친 누렇고 붉은 꽃들이 살랑이는 바람결에 맞춰 부비부비 춤을 춘다.

한쪽에 핀 금연화가 보였다. 금연화를 따 연화의 이름을 지었다고 들었다. 주인 할멈은 잊지 않고 금연화를 매해 심었다. 춤추는 금연화는 혀를 날름거리며 약 올리던 연화 년 어린 시절 모습 같았다. 도둑고양이처럼 금연화 앞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실실 웃으며 칼로 이파리와 꽃잎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분이 풀리지 않아 손으로 줄기를 잡아당겨 짓이길 때는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입에서는 '개 같은 년, 씨팔 년‘ 하고 욕설이 툭툭 터져 나왔고 꽃잎이 부서질수록 묘한 희열이 피를 타고 도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흙먼지가 날리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연화네 대문은 잠겨있을 테니 담을 넘어갈 생각이다. 어디부터 찌르면 분이 풀릴지 몰라 걷는 내내 생각했다. 연화년도 손가락부터 잘근잘근 썰어내 차가운 심장에 뾰족한 식칼을 꽂는 상상을 하니 온몸이 전율에 부르르 떨렸다. 좋아해 주면 더 집요하게 마음을 비트는 악마 같은 년. 멸시하는 눈빛이 생생했다. 잠이 안 들었다면 흉기로 내리쳐 기절시켜 죽일 각오도 했다. 목을 조르면 놀라서 바둥거리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죽어가는 연화 년을 상상했다. 차라리 잠든 것이 네년에게는 덜 고통스러운 최후일 것이다.

죽일 궁리를 하다가 주광색 가로등을 지났고 연화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살짝 흔들어보니 역시 잠겨있다. 벽에 바짝 붙어있는 쓰레기통이 보였다. 탐욕스러운 연놈들이 배설해낸 쓰레기가 들어있겠지. 소리를 질러 가족들을 다 깨운 뒤 어머니에게 하대했던 연화 엄마도 함께 죽여버릴까 생각했다. 먼저 연화를 죽인 뒤에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쓰레기통을 밟고 오르자 담이 얕아졌고 다리를 걸 수 있는 높이가 됐다. 마당에는 소나무 몇 그루, 관상용 분재가 보였고 연화 엄마가 작년에 설치한 발레를 하는 소녀 조각상이 보였다.

아라베스크 몸짓을 한 하얀 소녀상이 최후의 천사라도 된 듯 달빛에 반짝였다. 비가 온 다음 날에는 조각상을 닦으러 어머니가 이 집으로 건너오곤 했다. 포도나무에 검게 익어가고 있는 포도송이가 보였다. 어머니와 나를 난도질하고 이것들은 평화롭게 과일 익어가는 것을 감상하고 있었구나. 번쩍거리는 칼날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담에서 뛰어내렸다. '쿵.' 제법 큰 소리가 났고 들고 있던 식칼이 바닥에 깔린 디딤 석 위에 떨어졌다.

복수심에 가득 찬 늑대 한 마리처럼 세포가 날카롭게 곤두섰다. '누군가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움직이지 않고 창문을 지켜보았다. 젖은 운동화 안의 뒤꿈치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바람에 파르르 떠는 소리와 귀뚜라미가 찌르륵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귀를 어지럽혔다. 다행히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 걸음씩 발을 떼다 보니 어느새 연화의 방 앞에 성큼 도착했다. 불이 꺼져있었다. 방문이 잠겨있을 것 같았다. 부셔서라도 들어갈 생각이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부드럽게 돌아갔다.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니 심장이 더 세게 뛰기 시작했다.

방안은 어두웠다. 문을 걸어 잠그고 방 구석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침대 위에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를 걸치고 있는 연화가 또렷하게 보였다. 큰 창문에서 새들어온 달빛이 음습하게 연화의 몸을 덮치고 있었다. 달빛 아래 허벅지와 긴 팔을 대자로 뻗은 채 무방비한 상태인 것을 보니 광기가 치밀었다.

'네년 참 잘도 자고 있구나...'

날밤을 새우면서 두려움에 떨던 시간 동안 연화 년은 제 아비와 어미 품에서 희희낙락거렸을 생각을 하니 차가운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한 걸음, 한 걸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화의 새근거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갑자기 '댕! 댕!' 괘종시계가 두 번 울렸고,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연화가 잠에서 깼을까. 황급히 식칼을 등 뒤로 감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연화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요골동맥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 압이 오르고 손가락은 불이 나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때, 연화가 몸을 뒤척였다. 반대쪽으로 돌아눕자 성인 잡지에서 많이 본 여자의 몸처럼 큰 엉덩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달 같은 엉덩이를 반쯤 드러난 채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모습을 보니 비린 냇물 냄새와 짓눌렀던 이모의 괴성이 귀에서 웅성거렸다. 갑자기 성기가 팽창하고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잠시 어쩔 줄 몰랐지만 연화 년을 처참하게 유린하고 싶은 충동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희열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잘린 왼손으로 칼을 옮겨 쥐고 바지 위의 팽팽해진 성기를 만져보다가 지퍼를 내렸다. 며칠 씻지 못한 지린내가 뜨거운 땀에 전 채 바지에서 튀어나왔다. 성기에 손을 가져다 대니 저릿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헐벗은 여자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한 적이 많았지만, 그때와 달라 조금만 닿아도 봉숭아 씨방처럼 터질 듯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창백한 연화의 몸은 자극적이었다. 성기를 붙잡고 조금 움직이자마자 정액이 갑작스레 분출됐다.

일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 낯설었다. 천천히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연화 년을 찌르려고 팔을 올렸지만 무언가 모자라, 잠든 연화를 말없이 내려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바지 속에 집어넣지 않은 성기는 사정을 했지만 팽팽했다.

'가소로운 년.'

어찌 된 일일까, 연화의 뒷모습이 음탕한 늙은이에게 시달리다 돌아와 잠든 어머니의 모습과 겹쳤다.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왔고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지를 추스르고 연화를 한참 쳐다보았다. 천천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지만, 학교엔 가지 않았다.
  그 대신, 길 잃은 개처럼 후비진 곳을 찾아다녔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도 흐릿했다.

눈이 많이 오던 겨울이었다. 손가락은 제법 아물었고, 여자들만 보면 칼날을 쥐고 자위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을 다니던 읍내 누나, 술집에서 마주치는 여자들과 쉽게 밤을 보냈다.

폭설이 삼 일째, 내려 무릎 밑까지 하얀 눈이 차올랐고 술에 취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서성이는 여자를 보았다. 겉옷을 두껍게 입었는지 몸이 무거워 보였다.

집 앞에 만삭이 된 엄마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 지냈어, 범구야... 내 새끼."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였지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싸늘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외면한 채 문을 열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혼자다.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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