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사무사<思無邪>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돌베개출판사 한철희 대표가 좌우명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사무사(思無邪)’다. 『논어』 위정편(爲政編)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로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공자는 “『시경』 삼백 편을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고 했다. 흔히 정치의 요체를, 삶의 순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최고지도층의 삿된 행위로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는 지금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사무사’ 석 자는 오늘까지 서울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리는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모전’에 출품됐다. 한 대표는 지난해 1월 15일 타계한 철학자 신영복씨에게 이 글귀를 받았다. 벌써 23년 전의 일이다. 그는 당시 신씨가 편역한 『중국역대시가선집』 출간을 계기로 고인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번 전시에선 고인과 각별한 관계를 맺어 온 지인들의 소장품 14점이 처음 공개됐다.

 신씨는 고단한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존재였다. 1968년 통일혁명당 조작 사건으로 20년20일을 복역하다 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불의의 권력에 신산(辛酸)을 겪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 새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더불어 숲』 『강의』 등을 남기며 혼탁한 시대의 정화기 역할을 했다. 말과 글과 삶이 한결같은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 줬다.

 길거리엔 찬바람이 거셌지만 화랑 안에선 봄기운이 느껴졌다. 신씨가 2015년에 쓴 유묵 ‘유각양춘(有脚陽春)’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재상 송경(宋璟)에게서 유래한 말이다. 봄볕 같은 인품이 빛났던 송경은 가는 곳마다 백성이 따르고 풍속이 아름다워져 ‘다리가 달린 따듯한 봄’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인이 평생 추구한 ‘더불어 숲’ ‘함께 가는 길’과 사이좋게 어울렸다.

 국정 농단 사태로 ‘겨울공화국’이 따로 없는 요즘이다. 사회도, 경제도, 우리네 마음도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게 분명하다. 그 전령사로 ‘사무사’를 삼아 보자. 신씨의 또 다른 글씨 ‘춘풍추상(春風秋霜)’과도 통한다. 그는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너그러워야 하고, 자기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고 했다. 대권 주자들이 깊이 새길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족(蛇足) 하나. 고인이 출옥 후 사용한 호(號)는 그가 살았던 우이동에서 따온 ‘우이(牛耳), 우리말로 ‘쇠귀’다. 작품 낙관으로 즐겨 썼다. 그의 당부를 쇠귀에 경 읽기로 흘리는 누(累)는 다시 없어야 할 것 같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