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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의를 위해 18원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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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년을 맞아 가족들과 미국에 가서 지내다 2009년 2월에 귀국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귀국해 오랜만에 이전에 다니던 초등학교로 돌아온 큰아들은 충격에 휩싸여 혼란스러워했다.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학생이,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알아왔던 착하고 순한 친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욕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욕 한 번만 해도 교장실에 불려가고 부모님까지 호출되는 것을 봤던 큰아들은 말 그대로 완전히 ‘멘붕’에 빠졌다. 물론 적응력이 무척 좋았던 아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욕을 남들 못지않게 아주 찰지게 구사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가끔 묻곤 했다. 왜 한국 학생들은 욕을 많이 해요?

스스로 도덕적이라 판단할수록
나쁜 행동 하는 ‘도덕적 허가’
더 큰 숭고한 목적 위해서라면
18원을 보내는 게 합리화되나
그런 사람일수록 대를 위해서도
소가 희생되면 안 된다 했잖은가

 원래 한국인의 유전자에 욕 잘하는 어떤 인자가 있을 리는 없으니 초등학생들조차 욕을 많이 하는 이유는 아마 어른들이 하는 욕을 보고 배웠기 때문일 게라고 얘기해줬다. 최근의 우리 사회를 보면, 이 설명이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부적절한 언행을 하거나 자신과 의견이 다른 국회의원들에게 일부 사람이 후원금 18원을 보낸다는 보도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설마 그 18원이 욕에 해당하는 그걸까라고 당연히 의심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하필 18원을 보내는 이유가 뭐냐고. 내가 모르는 무슨 정치적 의미가 있느냐고. 그런데 모든 사람이 바로 그 욕이 맞다고 했다. 필자는 8년 전에 큰아들이 겪은 그 멘붕을 경험했다. 아니, 그냥 욕도 아닌 그런 쌍욕이 과연 공개적인 사회적 의사표현 수단이 되어도 괜찮은 걸까?

 단지 그 국회의원의 언행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자신이 그 국회의원의 의견에 얼마나 반대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강력한 의사표현 수단이 필요하면 그냥 1원만 보내도 될 것이다. 그 1원의 기부만으로도 반대 의사 표현의 상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솔직히 그 국회의원을 골탕먹이고 싶다면 후원금 영수증까지 요구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그런 쌍욕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궁금하다. 그 18원을 보내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자녀에게 뭐라고 설명할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잘못된 언행을 한 사람에게는 그 정도 쌍욕은 해줘도 된다고 가르칠 건가. 아니면 어른은 욕을 해도 너희들은 절대 욕하면 안 된다고 얘기할 건가.

   아마 그 18원을 보내는 사람들은 더 큰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그 정도의 작은 옳지 않은 행위는 허용되고, 심지어 때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할지도 모르겠다. 대를 위해 소는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그들이나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일반적으로 모든 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 그 어떤 대를 위해서도 절대로 소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국정을 잘 살펴본다는 중요하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소한(?) 법과 규정 따위는 무시하고 최순실에게 비밀을 누설하게 됐다’는 대통령의 해괴한 변명에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바로 그 분노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대를 위해 또 다른 소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논리가 말이 되나.

 어떻게 이런 모순이 가능할까. 실제로 자신이 스스로 어느 정도 도덕적이라고 판단되면 오히려 그 다음에는 비도덕적인 행동을 더 쉽게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있다. 이런 현상을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도덕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느 정도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도덕적인 행동을 더 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충분히 도덕적이라고 인식하면 역설적이게도 비도덕적 행동을 더 쉽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기제는 자신이 옳은 일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믿을 때, 역설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는 위험성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 사회는 헌법정신을 위반하고 국정을 농단한 일련의 무리를 색출하고 단죄하는 데 온통 집중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는 소중한 교훈이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또 다른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통해서라면, 과연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지고 미래의 한국 사회에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의 혼란 극복 과정은 먹고사는 것이 다른 어떠한 것보다 소중했던 과거, 경제발전을 위해 수많은 가치가 희생되고 다수를 위해 다수에 의한 폭력을 허용하던 구시대적 관습과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민의식을 완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믿을 때, 바로 그때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때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