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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하위층 절반 결혼 못해, 장가 간 비정규직은 '개천의 용'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보습학원 강사인 박재웅(37·가명)씨는 2년 전부터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박씨는 “결혼하면 잘난 사람, 못하면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는 분위기가 됐다. 나는 미혼이라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직장을 다니는 친구나 부잣집 자식들은 대부분 결혼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중 결혼한 친구는 거의 없어 그런 사람이 나오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한다”고 했다.소득이 적은 남성은 결혼하기가 어렵다. 중앙SUNDAY 설문조사 결과 30대 여성들은 배우자가 될 남성의 수입이 월평균 372만원(연 4464만원)은 돼야 한다고 답했다. 연 4500만원을 버는 20~30대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정규직의 평균임금은 월 279만원, 비정규직은 149만원이었다.
여성도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학강사 이정연(39·여)씨는 “공부하다 보니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결혼 적령기를 넘겼다. 그동안 괜찮은 남자는 다 결혼한 것 같다. 월 200만원 수입으로는 딱히 결혼하기도 어렵다. 노후에 외로워질 것 같긴 하지만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할 바에야 아예 혼자가 편하다”고 말했다.

여성 44% "결혼하고 싶지 않거나 못해"

여성들이 결혼에 더 소극적이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결혼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하고 싶지 않다’와 ‘하고 싶지만 못할 것 같다’를 택한 30대 여성의 비율은 43.7%였다. 남성은 22.6%였다.

소득에 따른 '유전결혼 무전비혼'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이 남성보다 눈이 높아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요즘 남자 한 사람이 벌어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는 어렵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남성들이 집 안 가사를 나누지 않는다. 의지가 있더라도 밖에서의 노동시간이 길어 집에서 가사를 돌볼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결국 여성이 회사일, 가사, 출산, 육아까지 책임져야 한다. 여성이 결혼을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기간제 체육교사 백영민씨가 처음부터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다. 백씨는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집 대출이자만 다달이 50만원씩 내면서라도 무리해 결혼을 한다고 치자. 그러나 아이가 생긴다면 빚더미에 오를 수밖에 없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움도 청해봤다. 백씨는 “부모님이 결혼을 걱정하시기에 ‘손자 낳으면 좀 도와주시겠냐’고 넌지시 말씀드렸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결혼 얘기를 안 꺼내시더라. 솔직히 내 노후도 걱정이 돼 연금을 붓고 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또 다른 걸림돌은 불안정한 직장이다. 그는 “언제까지 이 일(기간제 교사)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이는 마흔이 다 됐는데 저출산으로 학생수는 확 줄고 있어 불안하다. 기간제 교사 자리가 가장 먼저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출산과 청년 일자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안정된 직장(정규직)을 가진 20~30대 남성의 기혼 비율은 53.1%, 비정규직은 28.9%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기혼자 비율은 54%였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53%)과 비슷하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혼율 50% 미만의 30대 남성 집단은 소득 1분위에서 5분위까지다. 2005년에는 기혼율 50%에 미치지 못하는 집단은 소득 1, 2분위에 불과했다. 절반 이상 결혼하지 못하는 집단이 하위 20%에서 하위 50%로 확산된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도 안 좋고 노동시장도 불안정하다. 사실상 안전망도 전혀 없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 청년들이 불안을 느껴 결혼을 꺼리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결혼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소득과 저소득 계층의 결혼 가능성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2005년 30대 남성 중 소득 1분위 집단의 기혼율은 46.2%, 10분위는 92.3%였다. 약 1.9배 차이가 났다. 2016년 이 격차는 2.5배로 확대됐다.

결혼에 대한 의지도 직업과 소득에 따라 벌어지고 있다. 본지 설문에서 30대 남녀 중 ‘결혼하고 싶지만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생산직이 11.9%, 사무직 5.9%, 자영업 3.1%, 학생 3.0%, 무직 2.3%, 전문직 1.6%였다. 지난해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결혼정보회사 조사에서는 연 소득 2000만원은 20%, 5000만원 이상은 45%가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답했다.

미국 중하층도 결혼 못 해 가족 붕괴

지난해 발간된 책 『결혼시장』은 상류층만 결혼하고 중하층은 결혼을 못 해 가족이 붕괴되는 미국의 현실을 고발한다. 한국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와 조지워싱턴대 교수인 저자들은 “한때는 보편적이었고 한때는 저항의 대상이었던 결혼은 이제 미국 사회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계급 구분의 표식이 됐다”고 썼다. 책은 “상류층을 제외하고 결혼율이 급격하게 추락했다. 극빈층에서는 사실상 결혼이 사라졌다”고 했다.

미국에서 1970년에 비해 기혼율이 높아진 집단은 소득 상위 5%의 여성뿐이다. 고소득 전문직 남성은 더 이상 비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여성을 찾는다. 상류층끼리 결혼해 더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고 자원을 다음 세대에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외국에선 결혼율 저하로 인한 출산 감소가 한국처럼 심각하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여성이 많아서다. 한국인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거의 출산을 하지 않는다. 정부가 잠정 집계한 지난해 출산 아동은 40만6000명이다. 2015년보다 7.4%포인트(3만2420명) 줄었다. 올해는 40만 명 밑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통계에서 답을 유추할 수 있다. 고용이 안정적이고 임금이 높아 여성이 안심하고 결혼할 수 있는 ‘결혼할 만한 남성’(marriageable men)이 많아지면 결혼이 늘어날 수 있다. 정부도 결혼과 출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지난해 임금피크제 등 노동개혁을 통해 37만 개의 일자리를 새롭게 만들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의 큰 틀은 맞지만 일자리의 질을 저하시키는 파견근로자 확대 법안 같은 정책으로 청년들이 결혼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나영 교수는 “결혼 문제는 경제 환경뿐 아니라 주거문제, 교육문제, 육아문제, 노인문제 등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잘난 사람만 잘사는, 소수를 위한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공존과 공생, 인본주의를 고민하고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전면 개조 등 장기적 플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호준·강기헌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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