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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삼성과의 공방으로 한국에서 영향력 키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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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18면


일개 헤지 펀드가 한 국가를 상대로 15년의 공방 끝에 투자금의 20배, 연 평균 수익률 22%, 총 23억 달러의 투자 이익이라는 막대한 성과를 거뒀다. 이 투자의 주인공은 미국의 ‘행동주의(activism) 헤지 펀드’, 속칭 ‘벌처(vulture, 썩은 고기만 먹는 대머리독수리) 펀드’ 엘리엇(Elliott) 매니지먼트다.


엘리엇은 2001년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총 80억 달러의 국채를 상환하지 못해 국가 부도에 처했을 때, 표면가 6억3000만 달러어치의 국채를 1억1700만 달러에 매수했고, 2016년 24억 달러를 상환받았다. 93%의 투자자가 표면가의 30%만 상환받고 물러난 반면 엘리엇은 끝까지 법적 다툼을 벌인 끝에 원래 조건대로 상환받은 것이다. 폴 싱어가 1977년 설립한 엘리엇은 초기에는 전환사채(CB·사전에 정해진 가격에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와 주식의 차익 거래로 영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재정 위기에 처한 국가의 부실 채권을 인수해 수익을 올리는 영업 모델로 전환했다. 아르헨티나 외에도 페루와 콩고 등의 부실 채권에 투자했다.

[지배구조 불투명한 아시아 기업에 관심]
엘리엇은 부실기업의 채권 투자에서도 유사한 전략을 통해 수익을 올렸다.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회사채를 2009년 초 표면가의 9%에 매입하기 시작해 2011년 당시 엘리엇 전체 자산의 10% 수준인 20억 달러까지 보유 규모를 늘렸다. 리먼브러더스의 자산을 청산해 채권자들에게 지급한 누적 금액이 2016년 말 표면가의 40%를 넘어서면서 이 채권 투자는 엘리엇에게 이미 4배 이상의 수익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엘리엇은 양호한 부실 채권을 골라내는 재무적 분석 역량을 살려 기업 지분 투자를 통한 행동주의 투자를 한다. 최근에는 성장이 정체된 기술 기업에 주로 투자해 이사회에 진입하고 비용 절감, 자산 매각 등을 통한 사업 효율성 증대로 기업 가치를 끌어 올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엘리엇은 2015년부터 아시아 국가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는 공개적인 마찰을 꺼리는 문화 탓에 주주 행동주의의 움직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아시아 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 진출하면서 그동안 불투명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지배구조가 드러나게 되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특히 가족 경영 기업들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홍콩에서는 동아시아은행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실시한 증자에 대한 법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펀드의 목표물이 된 기업들은 대부분 글로벌 투자은행에 도움을 요청한다. 글로벌 투자은행은 인수·합병(M&A) 그룹 내에 행동주의 방어(activism defense) 팀을 두고 있다. 이 팀의 주요 임무는 펀드의 공격으로부터 기업 고객의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투자은행이 행동주의 펀드를 위해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투자은행 주요 비즈니스 전반에 걸쳐 잠재적인 고객이기 때문이다.

[법정 공방 대신 건설적 협력으로 선회]
투자은행의 역할은 기업 고객이 행동주의 펀드에 맞서 단순히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배당금 지급, 자사주 매입, 자산 매각, 분할·합병 등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에 대해 전략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그 과정에서 기업 고객이 행하게 되는 거래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린다. 행동주의 헤지 펀드 매니저 칼 아이칸의 배당 확대 요구에 애플은 사상 최대의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마련해 배당을 실시했고, 행동주의 방어 자문을 한 골드먼삭스·제이피모건체이스·도이치뱅크 등이 채권 발행 주간사를 맡은 것이 한 예다.


엘리엇은 2015년 글로벌 기업 삼성의 지배 구조에 메스를 대면서 우리나라에도 그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건에서는 ‘외국인 비용(liability of foreignness)’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대표적 외국인 비용으로 외국 기업에게는 현지 기업과 다른 평가의 잣대가 적용되는 ‘정당성(legitimacy) 확보의 어려움’이 있다. 즉 대다수의 국민들은 엘리엇의 합병 반대를 시장 논리에 따른 주주의 반대가 아닌 ‘외국 벌처의 탐욕’으로 여겼다. 결국 ‘외국 투기 자본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흔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작용했다.


엘리엇은 비록 의결권 다툼에서는 졌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도 많다. 우선 우리나라 대표 기업 삼성에 행동주의 펀드의 존재감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삼성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주로 외국인 주주를 설득해 치밀하게 접근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앞으로 행동주의 펀드, 특히 엘리엇의 외국인 비용은 상당히 낮아질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국민연금 사태로 엘리엇의 삼성물산 저평가 주장은 단순한 탐욕이 아닌 타당한 분석의 결과임이 밝혀졌고, 앞으로 그들의 국내 행보는 정당성을 인정받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2016년 10월, 엘리엇이 이번에는 삼성전자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구는 나스닥 상장, 특별 배당 정책 등 몇 가지만 제외하면 이미 금융시장에서 예측하고 있고 삼성도 내부적으로 고려하고 있을 방안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특히 엘리엇이 제시한 삼성전자의 투자·사업회사 분할 후 투자회사와 삼성물산의 합병하는 것은 사실상 경영권 승계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다. 엘리엇의 최고경영자인 존 폴락도 최근 “삼성전자는 세계 일류 기술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지만 지배 구조는 그렇지 못하고, 너무 많은 현금 보유로 인해 저평가돼 있다”고 말했다. 현재 여러 가지로 난처한 상황인 삼성에게 지배 구조를 바꿀 명분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특별 배당을 요구한 셈이다.

[국내 기업들, 주주와의 소통 강화해야]
최근 삼성물산 합병 논란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주주 행동주의가 부각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자율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도 도입된다. 앞으로는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위탁받은 자금의 주인인 국민이나 투자자들에게 투명하게 보고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2014년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하나로 스튜어드십 코드가 시행됐고, 이후 일본 기업 및 투자자들이 외국 행동주의 펀드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대표적 외국 행동주의 펀드인 ‘서드 포인트(Third Point)’는 2015년 ‘세븐&아이’ 이사회에 참여해 부당한 최고경영자(CEO) 승계를 막았고, 같은해 폐쇄적 가족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화낙’이 배당금을 두 배로 늘리고 창업 이래 처음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두 우리나라에서도 곧 목격하게 될 큰 변화다.


외국 행동주의 펀드는 아시아 국가에서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에서 목표 기업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던 서드 포인트의 설립자 다니엘 로브는 “기업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며 “특히 큰 기업을 상대할 때는 건설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엘리엇도 법정에서 다투는 행동주의가 아니라 국내 기업과 협력하는 건설주의(constructivism) 투자자로 변모할 것이다.


삼성을 포함한 국내 기업은 ‘경제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의 한 줄기인 주주 행동주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먼저 주주와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 행동주의 펀드는 이전보다 적은 규모의 지분을 매입하고 자신들의 요구에 동참하도록 다른 주주들을 설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해 기업은 적극적으로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해 주주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다음으로 행동주의 펀드에 비해 장기적 관점의 기관 투자자인 연기금, 국부 펀드, 인덱스 펀드 등과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다. 제이피모건체이스의 조사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목표 기업에 대한 평균 투자 기간은 6개월 미만이 47%, 1년 미만이 68%에 이를 만큼 매우 단기적이다. 따라서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장기적 이익을 희생시키는 요구가 있다면 장기 투자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실제로 2015년 트라이언 펀드(Trian Fund)가 듀폰을 상대로 의결권 다툼을 벌였을 때 최대 주주인 블랙록, 스테이트 스트리트, 뱅가드의 지원으로 듀폰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었다.


최정혁전 골드먼삭스은행 서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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