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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2017년 그때는 왜 그랬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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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그때는 왜 그랬을까?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때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국은 저성장, 고부채, 고령화로
벌써 만성적 경제 위기 겪고 있다
구조조정 미루고 땜질 대응하면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 될지도
올해는 눈 부릅떠야 할 격변기
‘그때 잘했더라면’ 후회 말아야

20년 전인 1997년이 그랬다. 외국 금융자본이 동아시아에서 빠져나가면서 7월에는 태국의 환율이 급등했고 뒤이어 홍콩과 말레이시아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우리는 동남아와 다르다. 펀더멘털이 좋다’며 위기를 회피했다. 이미 1월에 한보철강, 3월에 삼미, 4월에 진로가 쓰러졌지만 기업의 과잉 부채와 부실 투자의 심각성을 그때는 잘 몰랐다. 단기 외채가 많고 외환보유액이 부족한 경제에서 외국 투자자들이 대출을 갑작스럽게 회수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98년에 경제성장률은 -6.7%로 떨어졌고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났다.

2007년에는 미국에서 먼저 위기가 시작됐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로 가계 부채가 빠르게 증가했다. 미국 금융회사들은 주택대출과 연관된 새로운 파생금융상품들을 마구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연체율이 높아지고 주택 가격이 하락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이 쌓여갔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고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로 파급됐다. 그 누구도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면 실물경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는지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 세계가 적극적인 통화정책과 재정 확대로 대응했지만 아직도 위기로부터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했다.

동아시아 금융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10년 주기로 올해 한국 경제에 다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한국의 경제 위기가 항상 외부 충격에서 먼저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2017년은 심상치 않다. 미국이 지난해 12월에 기준금리를 0.25% 인상했고, 올해도 몇 차례 더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금리 인상으로 한국 금융시장에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 트럼프 신정부는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고 있고 4월에 있을 환율조작국 지정을 앞두고 중국과 무역마찰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간 통상 전쟁이 벌어지면 한국 수출도 피해를 많이 볼 수 있다. 미국이 우리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이행하고 무역흑자를 줄이라고 압력을 가할 가능성도 크다. 중국 경제는 성장률 둔화, 기업부채 증가, 금융 불안으로 경착륙할 위험이 있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우리 수출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과거 위기 때보다 높아져 외부 충격에 더욱 민감하다. 대내 구조적 문제 또한 심각하다. 최근 몇 년간 가계 부채는 소득에 비해 급증했고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하다.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고 경제 위기에 대응할 리더십은 불안하다.

새해가 되면서 경제 위기설이 파다하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외환·금융 위기를 겪을 가능성은 낮다. 신흥국이 겪은 금융위기는 주로 외환보유액 부족, 금융기관 부실, 과도한 정부부채 때문에 발생했다. 이 점에서 과거 위기 때와 비교하면 경제 여건은 훨씬 좋아졌고 정부의 위기 대처능력도 개선됐다. 그러나 장담하기는 어렵다. 하버드대의 로고프 교수와 라인하트 교수는 저서 『이번엔 다르다』에서 지난 800년간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많은 국가가 이번에는 남들과 다르다고 했지만 결국 금융위기를 겪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여러 위기가 한꺼번에 닥치는 ‘퍼펙트 스톰’을 겪을 수도 있다. 자국 우선주의의 세상에서 한국이 위기를 겪어도 어느 나라도 선뜻 나서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경제 위기를 예방하기 위한 위험관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 고부채, 저출산·고령화로 벌써 만성적인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일본은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수출 경쟁력이 하락했지만, 구조조정을 미루고 임시방편으로 대응하다가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한국도 이미 몇 년은 잃어버렸고, 이대로 가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작가인 조제 사마라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세상을 그렸다. 볼 수 있어도 보지 않으려 하는 눈먼 사람들에게 경제 위기는 말뿐이다. 한국 경제의 위기에 눈을 감은 거짓 예언자들이 대선을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한 대중영합적 공약을 내놓을까 걱정이다. 구조개혁의 쓴 약보다는 달콤한 땜질식 처방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격변기를 맞았다. 구한말(舊韓末) 못지않은 격랑의 시기다. 모두가 눈을 부릅떠야 한다. 더 큰 위기가 오고 나서 후회하면 늦는다. 2017년은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비전과 전략을 가진 지도자를 찾고 다 함께 당면한 경제 위기를 극복해 가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