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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통화스와프는 정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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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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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스와프야말로 정치다. 협정은 중앙은행 간 맺지만 결정은 재무장관, 또는 더 윗선에서 한다. 온갖 정치·외교 계산이 밑바탕에 깔린다. 가장 아쉬울 것 없는 나라는 물론 기축통화국,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영국·유럽연합(EU)·캐나다·스위스 딱 다섯 나라와만 협정을 맺고 있다. 웬만해선 더 늘리지 않는다. 아무나 다 해주면 아무도 달러 부족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중국·일본·한국이 몇 천억~몇 조 달러씩 미국 재무부 채권을 사서 들고 있을 이유가 사라진다. 세계 최대 재정 적자국인 미국 경제가 망가질 수 있다.

한·미, 한·중을 지렛대 삼아
일본이 먼저 손 내밀게 해야

따라쟁이 일본도 미국만큼 통화스와프를 정치적으로 쓴다. 지난주 아베 신조 총리는 부산 소녀상을 문제 삼아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했다. 문제는 정치·외교에서 생겼는데 엉뚱한 경제에 화살을 쐈다. 한국의 약한 고리, 외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이다. 전 고위관료 S씨는 “그럴 줄 알았다. 일본은 한 번도 우리가 꼭 필요할 때, 원할 때 도와준 적이 없다. 되레 가장 먼저 돈을 빼가고 뒤통수를 쳤다”고 했다. S는 몇 안 되는 국제금융 전문가다.

일본은 꼭 20년 전에도 그랬다. 외환위기가 몰아친 1997년 제일 먼저 한국에서 달러를 빼갔다. 무려 150억 달러. 그해 외환보유액이 많을 때 약 250억 달러였으니 절반이 넘는다.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일본 재무성을 직접 찾아갔으나 문전 박대했다. 미쓰즈카 대장상은 “미국이 봐주지 말란다”며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 임창렬은 “일본이 돈을 빼가지만 않았어도 한국 경제가 이리 됐겠나”며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한국 경제는 그때만큼 어렵다. 미·중 분쟁이 격화되면 외환 트라우마가 도질 수 있다. 한·일 통화스와프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백번 낫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조아릴 순 없다. 방법은 없나. S는 “과거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매달리면 백전백패다.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을 움직이고 중국을 지렛대로 써야 한다”고 했다.

과거를 돌아보자. 첫 한·일 통화스와프가 이뤄진 건 2001년이다. 일본이 먼저 제의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통화기금(AMF)을 만들어 맹주가 되고 싶어했다. 중국 위안화 견제를 위해 한국의 지원이 필요했다. 우리가 별로 필요하지도 않을 때 2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를 맺게 된 이유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또 어땠나. 일본은 처음엔 요리조리 뺐다. 그러다 그해 10월 300억 달러의 한·미 통화스와프 협상이 타결되자, 바로 달라졌다.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일 통화스와프는 그 후 일사천리로 7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일본에 한국의 입장은 큰 고려대상이 아니다. 미국 눈치, 중국 견제가 더 중요하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체계 갈등에 휘말린 지금, 중국을 활용하기는 어렵다. 10월 만기가 돌아오는 한·중 통화스와프를 되레 걱정할 판이다. 남은 건 미국이다. 그러니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도 트럼프 것을 잡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세 가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 ①북핵과 사드 ②월가 인맥 ③국민연금이다.

①미국의 지난해 말 현재 한국 증시 투자액은 약 189조원, 압도적 1위다. 북핵과 사드로 한국 시장이 흔들리면 미국의 타격도 크다. 이런 논리로 트럼프의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②월가 인맥을 지렛대로 써야 한다. 2008년 강만수의 경제팀은 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고문(전 재무장관)을 공략해 성공했다. 루빈은 당시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의 직속 상사였다. 비선 활용을 좋아하고 월가 출신이 많은 트럼프의 경제팀엔 더 효과적일 수 있다. ③500조원이 넘는 국민연금은 투자·일자리에 목말라하는 트럼프에겐 좋은 유인책이 될 수 있다.

트럼프 재임 기간, 300억~5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만 유지할 수 있어도 한국의 외환·금융 시장은 크게 안정될 수 있다. 안팎에서 위기의 폭풍이 몰려오는 시기에 자금 유출 걱정 없이 경제 살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어려울 때면 뒤통수를 때리는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건 덤이다.

이정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