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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침실에 살포시, 빛고운 대나무발 다시 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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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덕수궁 함녕전에 새로 매단 주렴 풍경. 전각 안에서 궁궐 마당을 내다보았다. [사진 아름지기]

덕수궁 함녕전에 새로 매단 주렴 풍경. 전각 안에서 궁궐 마당을 내다보았다. [사진 아름지기]

대나무를 잘게 쪼개 20일 가량 말린다. 석간주(石間朱)라고 불리는 도료를 옻칠과 섞은 후 나무에 칠해 검붉은 색을 낸다. 붉은 색은 궁중의 색깔이다. 옻칠은 방수·방충 효과가 있다. 건조된 대나무를 명주실로 한 땀 한 땀 엮어 거북등 무늬를 빚는다. 섬세한 손길,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형태를 갖춘 주렴(珠簾·발) 가장자리에 수박색 천을 대고 바느질을 해 작품을 완성한다.

아름지기 ‘궁궐 집기 재현 프로젝트’
명주실로 거북등처럼 엮은 ‘외주렴’
덕수궁 함녕전 전각에 3개 달아

덕수궁 함녕전(咸寧殿·보물 제820호)이 화사해졌다. 빛깔 붉고 무늬 고운 주렴 세 개가 최근 전각 외부에 새로 설치됐다. 함녕전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침전(寢殿)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각 주렴의 크기는 가로 292㎝, 세로 320㎝. 정면 9칸 건물 중앙에서 궁궐의 품격을 살려준다. 함녕전 안쪽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바깥을 환하게 볼 수 있지만, 바깥쪽에서 안쪽 공간을 자세히 볼 수 없다. 대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주렴은 조선시대 햇빛 가리개뿐 아니라 의례용으로 널리 사용됐다. 궁궐 내외부에 내걸어 왕실의 위엄을 드러냈다.

고종 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됐던 함녕전 정면. [사진 아름지기]

고종 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됐던 함녕전 정면. [사진 아름지기]

함녕전 외주렴은 문화재 보호단체 아름지기(대표 신연균)가 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의 협력과 에르메스 코리아의 후원으로 설치했다. 우리 궁궐을 되살리면서도 국내 장인들의 전통기술을 이어가자는 뜻에서 시작한 ‘궁궐 전각 내부 집기 재현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실이다. 아름지기 측은 2015년 함녕전 동온돌(고종의 거처)과 서온돌(왕비의 침실)을 정비하고, 전통 커튼인 ‘무렴자’를 재현했다.

이번 작업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염장(簾匠·발 제작) 보유자 조대용씩, 이수자 조숙미씨, 국가무형문화재 나전장 이수자 장철영씨, 경남 무형문화재 소목장 조복래씨, 경남 무형무화재 두석장(豆錫匠·황동장식 제작) 정한열씨 등 각계 장인이 참여했다. 조대용 장인은 “옛 궁궐이나 누각에서 사용됐던 주렴을 재현한 것은 처음”이라며 “다른 궁궐에도 널리 적용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름지기 고정아 문화기획팀장은 “올해엔 함녕전 가구 등 내부 기물을 재현할 계획”이라며 “덕수궁 다른 전각, 또는 다른 궁궐로 사업을 확장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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