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꽃가마일지 상여일지…

중앙일보

입력 2017.01.10 21:28

업데이트 2017.01.1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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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 훈 논설실장

최 훈
논설실장

보톡스(Votox) 시술에 대한 미국 위스콘신대의 2010년 실험은 감정을 느끼는 데 보톡스가 심각한 방해가 된다고 경고한다. 보톡스로 마비된 피실험자들은 특히 슬픔·분노의 감정을 얼굴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얼굴이 경직되자 자기공명영상촬영(MRI) 결과 뇌회로에서도 이런 감정의 처리 속도가 느려졌다. “보톡스 맞은 사람의

만성 대통령 피로증 시대
막차 타는 차기 대통령아
분권·통합할 각오 없다면
최악 가시밭길 맞을 운명

 표정이 상대와의 대화를 못 따라가 호감을 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마이클 본드 『타인의 영향력』) 청와대 약품 구입 목록에 등장한 ‘자낙스’란 항우울제 역시 사람을 흐리멍덩하게 만든다. 대통령이란 ‘업(業)’의 무게를 못 이긴 걸까. 대통령의 감정이 은연중 아래로 전염될 수밖에 없는 대통령중심제에서 이런 상태라면 소통과 국정이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다.

5100만 식솔과 연 400조원의 곳간을 챙기며 장차관급 130여 명 등 3000여 공복을 골라 임명할 제왕의 자리. 벌써 꽃가마를 타려는 욕망과 투쟁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다. 찬물 끼얹어 미안하지만… 차기 대통령은 역대 가장 험하고 우울한 가시밭길을 걷게 될 팔자다.

1987년 이래 우리 사회는 ‘만성(慢性) 대통령 피로증’에 시달려 왔다. 이 30여 년의 막차를 타는 게 차기 대통령이다. 젠가(나무탑 빼기) 게임처럼 박근혜 대통령 때 붕괴된 것일 뿐 21세기 시민사회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염증은 치유 불능 상황에 달했다. ‘투표율X득표율’ 기준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이래 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6명 모두 ‘30∼39%’의 국민 대표성만 인정받았다. 시작부터 과반이 탐탁지 않게 여긴 구도다. 한쪽 진영에 치우친 인사나 정책이라도 터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노무현의 호남 홀대론, 이명박의 ‘고소영’ 인사, 박근혜의 아버지 인맥·수첩인사 등 정권을 조기에 무너뜨린 건 대통령 진영의 반대쪽에 도사린 불만이었다.

제왕적 대통령 아래 몸살을 앓는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져 왔다. 자살률은 88년 7.3명(10만 명당)에서 2015년 26.5명으로 세 배 넘게 늘었다. 집회시위 역시 미국 쇠고기 반대 때인 2008년 1만3400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5년 들어 1만1300건으로 다시 가파른 증가 추세다. 2005년 2195건에서 10년 새 두 배가 넘은 검찰의 압수수색(2015년 4424건), 연평균 1만7000건을 넘는 세무조사 등. 제왕적 권력의 써늘한 ‘레이저 광선’을 요리조리 피해 가야 하는 중압감은 ‘피로사회’를 폭발 직전으로 몰아왔다.

촛불조차 차기 대통령에겐 부채일 수밖에 없다. 구체제를 깨트려 새 나라를 만들라는 드높은 요구 수준은 큰 부담이다. 철옹성의 제왕을 쫓아낸 촛불엔 이미 ‘관성(慣性)의 탄력’이 탑재됐다. 부패·비선 등 새 정권의 장막 뒤 실정(失政)이 다시 발각되는 즉시 촛불은 맹수로 돌변해 그를 새 먹잇감으로 삼을 것이다.

새 지도자에 대한 배려나 6개월의 허니문 기간이라…. 꿈 깨시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우루과이 사태’를 ‘우루과이 라운드’로 착하게 고쳐 주거나, 여인과의 전날 밤밀회를 봐달라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윙크를 웃으며 받아 주거나, 미리 짜 놓은 각본대로 대통령에게 질문을 안 했다며 힐난하는 노무현 청와대의 비서관을 참고 지나갈 순한 기자는 더 이상 없다. 후보 때부터 그들의 위엄과 신비를 깨트려 시청률로 보상받으려는 언론의 매서운 검증 앞에 놓인 건 십자가의 길뿐이다.

갈수록 제왕 노릇을 대신하려는 국회 역시 차기 대통령에겐 득실거리는 상어 떼 같은 존재다. 지난 10여 년간 의회는 정부가 발의한 입법을 14.7%(17대 국회)에서 7%(20대) 통과로 반 토막 냈다. 몽니에 가까운 견제다. 촛불의 에너지를 의회에서 새로운 제도와 법으로 전환시켜야 할 차기 대통령이야말로 설득의 인고(忍苦)가 감당 안 되면 불면의 나날을 지새울 수밖에 없다.

제왕적 대통령의 오랜 ‘불통’ 속에 대통령 고유의 영향력과 명예, 아우라(aura)도 사회의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있다. 유시민·전원책·김제동 등 방송·종편과 연예계 스타들의 한마디에 군중의 귀가 더 솔깃해진 시대다. 갈수록 정치 색깔을 짙게 띠는 TV 방송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도마 위에서 서서히 횟감으로 변해 가는 처지가 차기 대통령의 일상이 아닐까.

꽃가마일지, 상여일지. 갈림길의 요체는 ‘권력 분산’과 ‘통합’의 각오 여부다. 모두 대통령의 자기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시대의 가치다. 최상의 귀결은 스스로의 임기 단축과 권력 분산 개헌일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분명히 다짐해야 한다. “힘이 아닌 설득과 소통의 제왕이 되겠다”고. “영원한 진보의 아들이나 강고한 보수의 적자(嫡子)만으론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 못할 것”이라고. “규제의 족쇄를 풀어 사회 전 분야의 자율과 권한, 책임을 고양시키겠다”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겸허히 내려놓길 바란다. 제왕적 대통령 피로증에 절어 있는 나머지 모두를 위해. 스스로도 누구처럼 우울한 말년을 반복 않으려면.

최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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