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평생 직장은 옛말…금융권 감원 한파 올해도 이어진다

중앙일보

입력

 
“승진은 쉽지 않고, 버틴다고 퇴사 압박이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퇴직금마저 줄어들 테니 희망퇴직 조건이 솔깃했다.”

한 시중은행 박모 차장(44)은 최근 사내 희망퇴직 공고를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당장 나가서 할 일이 없다는 현실론이 발목을 잡았다. 계속 다니기로 결론을 냈지만 한숨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약 3000명. 지난해 1년간 국내 은행의 감원 규모다. 자연 감소분에 희망퇴직자를 더한 숫자다. 통계에 잡힌 9월까지만 1507명이 회사를 떠났다. 지난 연말에도 KEB하나은행 직원 742명이 퇴직했고, 농협은행에선 400여 명이 희망퇴직으로 짐을 쌌다.

유례없는 저금리에도 지난해 시중은행의 실적이 매우 다. 2016년 9월까지 신한·국민·우리·KEB하나 등의 누적 당기순이익은 4조5000억원으로 2015년 동기보다 36.4% 증가했다.

그럼에도 금융권의 구조조정 삭풍은 연초부터 거셀 전망이다. 국민은행에서만 지난해 국내 은행 전체의 감원 규모에 육박하는 직원이 곧 회사를 떠난다. 희망퇴직 모집에 무려 2800여 명이나 신청했다. ‘최대 36개월치 특별퇴직금’이란 보상이 역대 최대 규모의 지원자를 끌어냈다. 신한은행도 6일부터 16일까지 부지점장급 이상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우리은행은 지난달 전직 지원 프로그램 희망자를 접수했다.

신규채용은 줄었다. 신한은행 등 7개 주요 은행의 지난해 신규채용 규모는 2015년보다 1000명 가량 감소했다. 국민은행이 420명에서 240명으로, 하나은행이 500명에서 150명으로 줄였다. SC제일은행만 유일하게 증가했다.

제일은행 관계자는 “2015년 말 1000여명 규모의 특별퇴직을 단행하면서 일시적으로 신규채용 규모가 늘었다”고 말했다. 더 내보내고, 덜 뽑는 ‘상시적 인력 감축’ 기조가 뚜렷하다는 의미다.

손상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인터넷과 모바일 등 비대면 채널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각 은행이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에서 핀테크 발전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중국에서 지난해 한 해 동안 국유은행에서만 3만6000명이 회사를 떠났다. 인터넷 금융 결제를 사용하는 인구가 5억 명(모바일 포함)을 넘어서면서 지점에서 개인고객을 상대하는 직원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9월 기준 7개 주요 은행의 지점 수는 5010개로 전년 동기에 비해 3.1% 줄었다. 조만간 K뱅크와 카카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이 영업을 시작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인터넷전문은행은 무점포와 소수인력에 기초한 저비용 경영 구조가 특징인데 이들과 경쟁하려면 기존 시중은행도 인터넷·모바일 부문에 자원을 집중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업무에 대한 행원들의 눈높이도 낮아지고 있다. 지난해 8월 7명을 뽑은 한국은행 일반사무직(C3) 경력직 채용엔 804명의 현직 행원이 몰렸다. 대부분 3~5년차였다. 일반사무직은 총무·출납 등 일상적인 업무를 주로 담당한다. 승진에 한계가 있고, 대졸자가 주로 지원하는 종합기획직(G5)과 급여 차이가 꽤 난다. 직급 전환 역시 불가능하다. 한은 관계자는 “지점 감소와 성과연봉제 도입 등을 보면서 젊은 행원이 은행도 더 이상 평생 직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업계 사정도 마찬가지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국내 증권사 임직원 수는 3만5920명이다. 2011년(4만4055명) 정점을 찍은 뒤 5년째 쪼그라드는 추세다. 감원 칼바람이 불어 닥친 결정적인 배경은 2013년 말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증권사 인수·합병(M&A) 촉진 방안이다. 합쳐진 두 증권사 몸집이 일정 규모를 넘을 경우 투자은행(IB)이 되는 길을 터주거나, 업무 영역을 넓혀주는 것이 골자다. 증권업계 고인 물을 빼내고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취지였다.

그 후 증권업계에선 M&A 열풍이 불었다. 2014년 말 NH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NH농협증권)을 시작으로 최근 미래에셋대우(미래에셋증권+대우증권), KB증권(KB투자증권+현대증권)이 잇따라 출범했다. M&A를 거친 증권사 관계자는 “합병으로 업무가 중복되는 인력은 회사를 떠났다”고 말했다.

주식 거래 패턴이 과거와 바뀐 점도 원인이다. 지난해 스마트폰으로 사고 판 코스피 주식은 일 평균 1억2000만주로 총 거래의 32%를 차지했다. 직접 지점을 찾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거래를 끝나는 사람이 급증한 것이다. 그 여파로 지점은 급격히 줄었다. 지난해 9월말 기준 국내 증권사 지점은 1100개로 2011년(1780개) 대비 38% 감소했다.

증권사 관계자는 “수년간 이어진 박스권 장세로 수익을 내지 못하다 보니 충원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며 “거기다 로보어드바이저(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이 자산을 운용하는 서비스)가 업무를 대체하면서 인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새누리·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