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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문 알린 검안의도, 확인한 부검의도 “당연한 일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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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박종철 그후 30년 <상> 미완의 민주주의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창이 난 방에 대학생 한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누워 있었어요. 30분 정도 심폐소생술을 했는데 돌아오지 못했죠.”

고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당했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의사 오연상씨. [사진 김상선 기자]

고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당했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의사 오연상씨. [사진 김상선 기자]

내과 전문의 오연상(60·당시 중앙대병원 전임강사) 박사는 30년 전 고(故) 박종철씨의 시신을 처음으로 본 의사다. 그는 경찰관을 따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향한 1987년 1월 14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30년 전 세상 바꾼 ‘평범한 분노’
본지에 제보 이홍규 당시 대검 과장
“함구령에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시신 화장 요청 거부한 최환 공안부장
“직을 걸고라도 사건 밝히겠다 생각”

“2~3명이 타기도 힘든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었어요. 사망한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형사들이 시신을 담요로 둘둘 말아 세워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더라고요.”

이튿날 박종철씨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연구실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당시 “조사실엔 욕조가 있었고 폐에선 수포 소리가 났다. 바닥에는 물이 많았다”고 말했다. ‘물고문’이란 표현을 직접 쓰지 않았지만, 정황을 암시한 그의 발언으로 정국이 들끓었다. 오 박사는 검찰과 경찰에서 20시간 가까이 조사를 받은 뒤 서울 도봉구의 한 호텔에서 일주일간 숨어 지냈다.

박씨 사망을 특종 보도한 신성호 교수(왼쪽·당시 중앙일보 기자)와 취재원 이홍규(당시 대검 공안4과장)씨가 서울 남영동에 있는 박씨의 추모공간을 보고 있다. [사진 김상선 기자]

박씨 사망을 특종 보도한 신성호 교수(왼쪽·당시 중앙일보 기자)와 취재원 이홍규(당시 대검 공안4과장)씨가 서울 남영동에 있는 박씨의 추모공간을 보고 있다. [사진 김상선 기자]

오 박사는 “민주주의를 이뤄야겠다는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하는 건 의사로서 당연한 본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후 2009년까지 중앙대병원에서 근무한 뒤 개업해 서울 흑석동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의 한 장면을 지켰던 그가 보는 30년 뒤의 모습은 어떨까. 오 박사는 “예전에는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도 사라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돈만 좇는 요즘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겪고 있는 최근 의료계의 현실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내과는 인기가 없다. 돈이 안 된다. 후배들에게 ‘금전적 성공이 전부가 아니다’고 하면 당장 ‘웃기는 소리 한다’고 반응한다”고 말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란 특종기사로 박종철씨 사망 사건을 처음 보도한 신성호(61·당시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취재하면서 확신을 가졌다. 한창 돌던 윤전기를 세우고 기사를 실었다”고 말했다. 그는 보도 이후 정보기관에 잡혀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회사 근처 여관에서 잠을 자야 했다.

1987년 1월 26일 고(故) 박종철씨 추도 미사가 끝난 뒤 서울 명동성당 앞에 모인 사제단과 수녀, 대학생 등 2000여 명이 전두환 정부의 반인권적 고문을 규탄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1987년 1월 26일 고(故) 박종철씨 추도 미사가 끝난 뒤 서울 명동성당 앞에 모인 사제단과 수녀, 대학생 등 2000여 명이 전두환 정부의 반인권적 고문을 규탄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신 교수에게 박종철씨 사망 사실을 처음 알린 ‘딥 스로트(Deep Throat·익명의 내부 제보자)’ 이홍규(80·당시 대검찰청 공안4과장)씨는 “위에선 ‘말하면 큰일 난다’고 했지만 무고한 학생의 죽음을 그냥 눈감을 순 없었다. 신 기자를 보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지난 5일 오랜만에 여의도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신 교수가 “그때 이후 민주화가 됐지만 오히려 불평등과 언론의 정파성은 심해졌다”고 하자 이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종철씨의 시신을 부검했던 황적준(70·당시 국과수 부검의) 전 고려대 법의학과 교수는 당시 ‘사인을 심장쇼크사로 하라’는 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결과를 내놨다. 그 덕분에 오연상 박사가 진술한 고문 정황이 사실로 확정됐다. 은퇴 후 책 집필을 준비 중인 그는 “법의학 배울 때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고 배웠다. 직업 윤리에 따라 행동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다.

최환(74·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변호사는 경찰의 시신 화장 요청을 거부하고 사체보존 명령을 내렸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그는 “사건을 접했을 때부터 고문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내 직을 걸고서라도 이 사건은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1999년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노근리사건 대책단 자문위원’ 등으로 사회 활동을 이어온 그는 “이 사회에는 여전히 권력과 돈에 부역하는 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사건 축소·은폐 시도는 ‘용기 있는 행동’들에 의해 폭로됐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직분과 직업 윤리에 충실한 보통 시민의 작은 용기였을 뿐이라고 했지만 민주주의 물꼬를 튼 거룩한 발자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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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이었던 안유(72)·한재동(70)씨도 그렇다. 이들은 복역 중이던 이부영(75)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정부의 축소·은폐 사실을 고발하려 쓴 편지를 그해 3월 교도소 밖으로 보냈다. 안씨와 한씨는 2004년 은퇴한 뒤 각각 수산업체와 대학에서 일하고 있다. 한씨는 본지 인터뷰에서 “내가 편지를 외부에 전달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부독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뜻이 같아서 진실을 밝히는 일을 도왔다”고 말했다. 한씨가 전달한 편지는 전병용(71) 교도관을 통해 김정남(75) 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중앙위원에게 전해졌다. 김 전 위원은 다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편지를 전달했다. 두 달 뒤 고(故) 김승훈 신부 등이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편지 내용을 폭로했다.

◆6월 항쟁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1987년 6월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 서울대 학생(고 박종철씨) 고문 치사 사건으로 1월에 시작된 시위는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의 6·29 선언을 발표했다.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 폐지, 헌법재판소 부활 등을 명시한 제9차 개정 헌법(현행 헌법)이 10월 29일에 공포됐다. 이 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 체제를 ‘87년 체제’라고 일컫는다.

◆특별취재팀=한영익·윤정민·김민관·윤재영 기자 hanyi@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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