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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범의 쏘울루션] ⑧은둔형 외톨이 “사람을 만나기 싫다”

중앙일보

입력

“이런 병도 고칠 수 있습니까?” 어느 날 한 여성이 남편 문제로 상담을 청해 왔다. 남편은 가족 외에 사람과의 접촉이 거의 없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고 했다. 그는 인터넷을 하며 밤을 새우고, 낮에 늦게까지 자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사에 투정과 불만이 많았고, 잘 토라지는 성격을 가졌는데 그 정도가 어린애 같아서 비위를 맞추기가 너무 힘들다는 게 아내의 설명이었다. 친척들과 만남이 있을 때도 별 뜻 없는 말에 어김없이 삐지고,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자녀와 티격태격 싸우는 것 역시 지나칠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본인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점이었다.

그는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 같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체구는 왜소하고, 깡말랐다. 얼굴엔 신경질적 성향이 묻어났다. 그는 오랫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했다가 실패해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최근엔 그마저도 그만뒀다. 강의가 주로 밤에 있으니 매일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은 게 습관이 됐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밥 먹는 것도 귀찮아 살이 점점 빠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합니다. 정말 화가 나요.” 비판이나 거절·지적에 민감한 것은 물론 열등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과만 관계를 맺었다. 자연히 적절한 대인관계 형성의 기회를 놓치게 됐고, 은둔적인 생활이 자연스러워졌다. 전형적인 회피성 인격장애다. 사법고시에 실패한 좌절감이 지나친 경계심으로 악화한 것이 주 요인이었다.

이런 회피성 인격장애를 고대의학서인 『상한론』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로 인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에 머무는 생활을 오랫동안 한 후, 계속해서 피로하고, 마음은 허전하며, 몸은 파리하게 말라간다.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죽엽석고탕을 투여한다.” (?陽易差後勞復病 397. 傷寒?後, 虛羸少?, 逆欲吐, 竹葉石膏湯主之.)

원문 중에 의미 있는 한자를 풀이해 보자. 먼저 ‘음양역(陰陽易)’의 ‘음(陰)’은 밤을 의미한다. 상한론이 저술된 1800년 전 후한시대는 복잡한 음양철학 사상이 성행하기 전이다. 당시의 음양은 지금보다 소박한 의미로 사용됐는데 음은 하루 중 가장 추운 밤을 뜻한다. 반대로 ‘양(陽)’은 하루 중 가장 따뜻한 낮을 말한다. ‘역(易)’은 그릇에 담긴 물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 모습이 변형된 글꼴로 ‘바꾸다’라는 의미가 파생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기(少氣)’는 어린아이의 기운을 말한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자. 낮과 밤이 바뀌었다는 것은 곧 질서가 뒤 바뀐 것이다. 인류는 해가 뜨면 일어나 밖으로 나가 일을 했고, 해가 지면 수면을 취하는 생활을 지속해왔다. 반대로 생활한다는 건 대대손손 전해져 온 인간의 생체시계를 고스란히 역행하는 것이다. 생체 리듬이 깨지면 정상적인 신체 활동뿐 아니라 정신적인 활동도 이뤄질 수 없다. 일설에 의하면 늦은 밤 1시간의 업무는 낮 4시간 업무의 피로와 견준다고 한다.

이처럼 은둔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감정이 있을까? 가장 먼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그 아래에는 타인에 대한 불신이 놓여있다. 두려움과 불신은 자발적인 고립의 동기를 부여한다. 은둔형 외톨이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고, 인생을 허무하게 느끼는 경우 많다. 겉보기엔 초연하게 보이나 걱정과 근심, 불안이 많아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안정한 인간관계는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외적인 조건이 사라지면 더욱 쉽게 와해되고 만다. 인간은 사회적 욕구를 가지고 있어 소통하며 공감하는 생활을 원하지만 은둔형 외톨이는 사회적 욕구가 점점 사라지면서 이 공감하는 마음조차 사라지게 된다.

다시 사연의 주인공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쩌다 사람들을 회피하며 살게 됐을까? 그는 어린 시절 천재로 불렸다. 최상위권의 학교 성적 유지하며 주변의 부러움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가정과 학교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면서 평범한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점차 우월감에 젖어 들었다. 그에게는 희한한 습관이 있었다. 낮에 졸고, 밤에 올빼미처럼 공부하는 버릇이었다. ‘졸면서도 일등을 하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걸 은근히 즐겼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최고의 법대에 진학했고, 사람들은 그의 사법고시 합격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본인 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의 낙방을 경험하게 되자 인생에서 처음 겪는 낙오자의 신세를 견디지 못했다.

이 같은 은둔형의 회피성 인격장애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가치가 충족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공허해지고 몸에도 문제가 생긴다. 가장 먼저 낮과 밤의 일상적인 생활 패턴을 회복해야 한다. 자신의 수면 습관이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기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당장의 변화가 어렵다면 취침 시간을 30분씩 앞당겨 자는 습관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 둘째, 낮 시간에는 무조건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려야 한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간의 정취를 느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나에게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거울효과’다. 다양한 사람을 접해야만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주어지고, 이를 통해 정신적인 성숙을 맛볼 수 있다. 셋째, 주어진 현실에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도망가서 숨을 곳이 없기에 숨을 필요가 없음을 인지하고,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은둔하며 고립을 자초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창살로부터 과감히 박차고 나와야 한다. 내가 환자에게 내가 치료법 역시 억지로라도 생활리듬부터 되찾으라는 것이었고, 다행히 그는 얼마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됐다.

비단 이 환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행동 양식은 일본에서 한때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히끼꼬모리’와 매우 흡사하다. 히끼꼬모리는 상처를 받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인간형을 말한다. 우리말로 ‘은둔형 외톨이’라고 할 수 있다. 혼술·혼밥 문화에서 보듯 최근 한국에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홀로’ 지내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가 조만간 사회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우선 자신의 생활리듬부터 점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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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범의 쏘울루션]은 현대인이 겪는 여러 마음의 질환을 다루고, 고대 의학서인『상한론(傷寒論)』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아본다. 총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저자인 노영범 한의사는 30년 노영범 부천한의원 대표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공황장애, 우울증, 주의력 결핍 등 신경정신질환 전문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계를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21인’으로 선정된 바 있고, 2007년부터는 한국소비자보호원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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