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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에 밀려난 ‘메이커’의 꿈 … 10대 ‘괴짜’ 조기발굴로 진로 터주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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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10면

경기도 일산 대진고 1학년 김성욱(17)군은 요즘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꺼놓고 산다. 아침에 집을 나와 수학·영어 과외를 받고, 오후 1시쯤 학교로 가서 밤 10시까지 자습을 마치면 다시 자정 전까지 과외를 하고 귀가한다. 겨울방학이라지만 학기 중일 때보다 일정은 더 빡빡하다. 김군은 “대학에 가려면 고2나 고3 때 내신성적을 좀 더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신나는 소프트웨어(SW)교육 수기 공모전’에서 장관상(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1학년 때 태양열로 움직이는 자동차, 안드로이드 기기를 활용해 무선 조종하는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프로그래밍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썼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대입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앞으로 2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1학년 조정민(20)씨는 김군처럼 부산영재학교 재학 중 잠시 꿈을 유예했다가 수시모집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중학생 때 RC카(Radio Control Car, 무선으로 조종하는 모형자동차) 제작에 빠진 뒤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조씨는 “요즘엔 3D프린터와 레이저커터를 활용해 패트병 등 플라스틱 제품을 잘게 쪼개는 새로운 분쇄기를 만들려 한다”며 “대학 전공과 관련은 없지만 그냥 재미있다”고 말했다.


‘나는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 김군과 조씨는 도구를 활용해 뭔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낀다. 물론 입시 등으로 인해 하고 싶은 일을 잠시 유예해야 하긴 하나 그 욕망을 누를 수는 없다. 이러한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건 김군에겐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선’, 조씨에겐 3D프린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트북 컴퓨터, 마이크로컨트롤러 보드(기판), 케이블 등이 덧붙여지면 만들어 낼 수 있는 범위는 더 넓어진다.


광주광역시 서강고 2학년 문희주(17)양이 얼마 전 강아지의 심박체크 기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두이노(컴퓨터 역할을 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와 이를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포함한 컴퓨팅 플랫폼) 덕분이다. 문양은 “기존의 심박체크 기기는 접촉식인데 비해 이건 비(非)접촉식”이라며 “스마트폰 앱과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말했다.

[나는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
개인 메이커(maker)가 주변에 등장하는 배경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관련이 있다. 컴퓨터 한 대와 손바닥만 한 마이크로컨트롤러 보드, 사물인터넷(IoT) 센서, 케이블 등 간단한 도구 몇 개만 있으면 웬만한 전자기기를 직접 만들 수 있다. 미국에서 해마다 열리는 메이커 페어(Faire)엔 70만 명이 넘는 메이커들이 참여한다. 김윤정 한국과학창의재단 본부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프로슈머(소비자 겸 생산자) 또는 메이커(maker, 만드는 사람)가 창업을 주도하며, 이들이 결국 산업혁신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 세계 드론(무인항공기)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하고 있는 DJI의 왕타오(汪滔) 회장도 어릴 때부터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모형비행기나 모형로봇 조립에 몰두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드론)와 소프트웨어(조정키트)를 개발해 낸 메이커 출신이다.

[10대 괴짜 왜 없는지 고민해야]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 비하면 한국에선 메이커들의 활동이 아직 미약하다. 미래창조과학부 집계에 따르면 온·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메이커 커뮤니티(메이커들이 모여 자신의 창작물을 제작한 경험을 공유하는 모임) 수가 지난해 기준으로 103개다. 게다가 만들기가 취미생활에서 돈 되는 창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다. 김보경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원은 “한국에 있는 메이커 5명 중 4명이 취미로만 활동하며, 창업에 도전하는 비율은 전체의 5% 정도”라고 말했다. 드론이나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테크(tech) 메이커들의 숫자는 많지 않은 반면 목공예나 홈베이킹, 홈인테리어 등을 하는 메이커가 대부분이다.


이민화 KCERN(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은 “외국에 비해 한국에서 메이커 운동은 초기 단계인 데다 외국에선 메이커 운동을 주도하는 층이 10대 중·고교생들인데 한국에선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 “대학에 들어가는 입시 문제 탓인지 관심이 끊기기도 한다”며 “왜 한국에선 10대 긱(geek·괴짜)이 나오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10대 괴짜들이 직접 공개하는 코드·제품 등 공유물이 유튜브에 넘쳐난다.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게 요즘 괴짜의 특징이다. 한국에서 회원 수가 2만3000여 명인 메이커 커뮤니티 자작매니아 강성원(45) 매니저도 “중학교 때 뭔가를 만들고 싶은 호기심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학생들이 고교에 들어가면 대입 준비 때문에 활동을 단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과도한 입시 경쟁 탓에 학업과 메이커 활동을 병행하는 고교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앞으로 국내 10대 메이커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여지도 분명 있다. 우선 수시모집이라는 대입 제도의 확대다. 서울 상문고는 지난 3년간 교내에 ‘무한상상실’을 운영했다. 이는 미래부가 시설 등을 지원하는 메이커 스페이스(메이커들의 작업 공간)다. 이 학교 남준희 교사는 “수업시간엔 흥미를 잃고 잠자는 아이들이 직접 실습도구를 만지며 재미를 느낀다. 내신성적만으로는 서울시내 대학에 가기 어려운 학생들이 만들기 활동 실적을 쌓아 대입 관문을 통과한다”고 말했다. 수능이나 내신성적만으로 줄을 세워 대학에 가게 하던 과거 시절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내년부터 초등·중학교에서 실시되는 소프트웨어 교육을 통해 소프트웨어 분야에 자질과 적성을 갖춘 10대 괴짜가 조기 발굴될 수도 있다. 박세만 한국과학창의재단 소프트웨어실장은 “학생들은 소프트웨어교육을 통해 문제를 정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고리즘적 사고를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는 기존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육을 받게 된다”며 “소프트웨어 분야의 진로 탐색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아직까진 한국에서 개인 메이커가 전문 메이커로, 이어 제조 창업으로 성공하는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초·중학생이 사회에 뛰어드는 10년 이후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코딩교육 전문 기업인 대디스랩 송영광 대표는 제안했다.


“3D프린터를 예로 들어 보자. 아직까진 제조기업이 금형을 떠 만든 제품 수준과 비교하면 개인이 3D프린터로 만든 제품의 질은 좋지 못하다. 하지만 몇 년 있으면 상황은 역전된다. 앞으로 개인이 값이 싸거나 무료로 빌릴 수 있는 생산수단을 활용해 제품이란 결과물(output)을 내며, 이를 시장에서 내다파는 게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온다. 학교와 일터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연계되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교육의 기존 틀을 바꿔야 한다.”

[용어 설명]
긱(geek)=컴퓨터나 비디오게임, 애니메이션 등 자신이 좋아하는 걸 끝까지 파고들며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덕후(일본어 ‘오타쿠’에서 파생된 말로 한 분야에 몰입하는 사람)’의 의미를 담고 있으나 남과 소통을 한다는 점에서 오타쿠나 너드(nerd·공부벌레)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마니아적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거듭나기도 한다.


메이커=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 또는 단체를 말한다. 최근엔 3D프린터 등 디지털 기기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상상력을 바탕으로 제품이나 서비스 등을 만들어 내는 발명가·공예가·창작자 등도 포함한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을 넘어서서 정보를 교류하며, 제품을 팔아 수익을 남기기도 한다. 메이커는 미국이나 중국에선 취미 수준의 창작자에 머물지 않고 창업으로 연계되는 1인 제조업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커뮤니티를 이루고, 만들기 결과물과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을 메이커 운동이라고 한다.


메이커 스페이스=메이커들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도구와 장비를 갖춰 놓은 작업 장소를 말한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지난해 학교와 공립 도서관 등에 3D프린터와 레이저커터 같은 디지털 제작도구를 갖춘 공간을 만들어 메이커들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도 서울 전자상가를 중심으로 민간 메이커 스페이스가 생겨나고 있으며, 전국의 일부 고교와 대학, 구청 등에도 ‘무한상상실’이라는 이름의 메이커 스페이스가 갖춰져 있다.


취재팀: 강홍준 사회선임기자, 강기헌 기자


자문단: 권대봉 고려대 교수(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김도연 포스텍 총장, 김세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원(노동시장), 김진영 건국대 교수(경제학), 김태완 한국미래교육연구원장(전 한국교육개발원장), 김희삼 GIST 교수(기초교육학부), 박준성 교육부 기획담당관, 이민화 KCERN(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혁신), 이주호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전 교육부 장관),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교육학), 이화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원장(교육과정),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교육학), 정철영 서울대 교수(산업인력개발), 최영준 연세대 교수(행정학), 한유경 이화여대 교수(교육학)※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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