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원의 정치, 통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중앙일보

입력 2017.01.07 01:37

업데이트 2017.01.0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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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익명의 ‘외로운 늑대(Lone Wolf·자생적 테러리스트)’들이 여의도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18원 후원금’과 ‘문자 폭탄’이란 새로운 압박 수단에 의원들이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욕설을 의미하는 18원 후원금과 문자 폭탄은 지난해 11월 말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찬성·반대하는 의원들 명단을 공개하면서 등장했다.

문재인 비판한 비문계 의원
항의성 후원금 18원 쏟아져
공격적 적대감 표출 우려 속
‘저비용 스마트 정치’ 평가도
“직접 정치 참여 제도화 필요”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촛불집회로 직접 참여 공간이 열리면서 반대 진영에 대한 분노·적개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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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이나 거짓 문자 등은 문제지만 문자를 발송하는 행위 자체, 18원의 정치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의견도 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과거 고비용 동원정치에서 자발적으로 여론이 결집되는 저비용 스마트 민주주의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하는 의원들은 “살려 주세요” 라는 하소연을 연발하고 있다.

18원 후원자들은 의원실을 골탕 먹이기 위한 목적으로 세금계산서 발급도 요구하고 있다. 세금계산서를 떼서 우편으로 보내는 비용은 18원 이상이며 일일이 발송하기엔 시간이 만만치 않다. 한 의원실 보좌관은 “반드시 발급해 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계산서 발급을 요구하는 전화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친문계 김광진 전 민주당 의원이 트위터에 “정치후원금 18원을 보내는 것보다 보낸 후원금을 환불 요청하는 것이 의원들을 더 괴롭힐 수 있다”는 글까지 올려 기름을 부었다.

5일 오후 8시까지 민주당 정책연구소 ‘개헌 저지’ 보고서를 비판한 김부겸 의원에게 온 3108개 문자 .

5일 오후 8시까지 민주당 정책연구소 ‘개헌 저지’ 보고서를 비판한 김부겸 의원에게 온 3108개 문자 .

문자 폭탄을 맞아 스마트폰이 뜨거워진 의원들은 부랴부랴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고 있다. 최근 3100여 개의 문자를 받은 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6일 번호를 바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은 “개헌을 매개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의 ‘제3지대’가 형성되면 민주당을 패배로 이끌 수 있다”며 “문재인 전 대표에게 유리한 4년 대통령중임제에 긍정적인 의원을 국회 개헌특위에 다수 참여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개헌 저지 보고서’를 냈다. 이에 개헌론자인 김 의원은 지난 4일 “벌써 대선 후보가 확정된 것처럼 당 공식 기구가 편향된 전략보고서를 작성한 건 어이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가 비난 문자를 받았다. 문 전 대표는 6일 페이스북에 “동지들에게 간곡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호소드린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일각에서 우리끼리 과도한 비난은 잘못”이라는 글을 올렸다.

덴마크에 ‘정유라 결백’ 메시지…김부겸에겐 ‘문자 3100통’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해 팬클럽 회원 과 만나서도 ‘선플(좋은 댓글) 운동’을 제안하며 지지자들에게 다른 진영 비판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앞서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도 지난해 촛불정국 때 번호를 교체해야 했다. 박 의원은 지난해 탄핵정국 당시 “탄핵안을 12월 2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는 힘들다”고 했다가 탄핵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쳐 하루 만에 2만 개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문 전 대표 공식 팬클럽 ‘문팬’의 운영진인 김기문씨는 본지 통화에서 “(문자 폭탄은) 팬클럽 차원의 조직적·집단적인 공격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가수 조영남씨 그림 표절 논란 당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공격당한 뒤 6개월째 SNS상에서 절필 중인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도 신중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까지 억압당해서는 안 된다”며 “18원 후원금 등이 싫은 의원은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논란과 관련, 가상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유권자의 자발적인 참여 욕구가 대의제를 훼손하지 않도록 유권자의 제안을 수용하는 국민발안제 같은 직접 참여를 제도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앞서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 당시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은 정동춘 K스포츠재단 이사장과 사전 공모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18원 후원금과 문자 폭탄 공세를 받고, 특위 위원 및 간사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최근엔 민주당 개헌 보고서 내용을 문제 삼았던 비문(非文)계 의원들이 표적이 되고 있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보고서를 비판했다가 ‘18원 후원금’ 세례를 받았다. ‘국회개헌반대’란 예금주는 1원과 17원을 나눠 입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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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폭탄 중엔 해외로 향하는 것도 있다. ‘일간베스트(일베)’에는 “유라 정은 정말 결백하다. 한국 검찰과 언론은 믿지 말라고 덴마크에 문자를 보냈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타깃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구금돼 있는 덴마크 검찰청 사이먼 고스비 공보관이었다. 게시글을 올린 일베 아이디 ‘2bay’가 고스비 공보관의 연락처를 알려 주자 다른 일베 회원들이 호응했다. 고스비 공보관은 본지 통화에서 “기자냐, 시민이냐”고 되물어 한국에서 다수의 전화가 걸려 왔음을 시사했다.

정효식·위문희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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