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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귀뚜라미를 ‘좀비’로 삼은 선충, 물에 뛰어들어 죽게 해 번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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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영화 같은 자연계 좀비 현상

좀비가 퍼지는 고속열차 안에서 주인공 석우(공유)가 딸을 구하려고 사투를 벌이는 영화 ‘부산행’. 1156만 명이나 관람해 지난해 영화 중 가장 크게 흥행했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이내 또 다른 좀비로 변해 멀쩡한 사람을 눈에 띄는 대로 물어뜯는다.

말벌, 바퀴벌레 쏴 다리에 알 낳고
부화한 애벌레가 바퀴 먹어치워
왕개미 머릿속에 들어간 곰팡이
포자 퍼뜨려 또 다른 개미들 공격
달팽이 눈자루에 침투한 기생충
새가 먹게 해 새 내장에서 알 낳아
나방 등 다양한 생물을 좀비로 이용
숙주에 침투, 목숨 빼앗고 종족 번식

영화에서 좀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살아난 시체로 묘사된다. 또는 바이러스·약물 등에 감염돼 자기 의지를 잃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원래 ‘좀비’란 용어는 영화 속 설정과는 달리 ‘부두교’라는 이색 종교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비밀단체가 멀쩡한 사람을 약물로 중독시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해 노예로 부린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선 다른 생물을 조종해 부두교의 좀비처럼 이용하는 현상이 다양하게 관찰된다. 이런 현상에서 착안한 영화가 2012년 개봉해 451만 명이 본 ‘연가시’다. 영화에선 기생생물인 연가시(철선충류) 변종이 나타난다. 이 변종에 감염된 사람은 갈증을 못 이기고 연거푸 물을 마시다 기어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를 익사시킨다. 변종이 사람의 뇌를 조종해서다.

영화 ‘연가시’에서처럼 사람이 바이러스 혹은 약물에 감염돼 조종을 받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서민 단국대 의대(기생충학) 교수는 “연가시가 사람을 물에 뛰어들게 하진 않지만 곤충에겐 충분히 이런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 기생충은 곤충의 뇌에 침입해 갈증을 유발하는 물질을 분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기생충이 독소나 효소·호르몬·단백질 등 다양한 물질을 숙주의 뇌에 분비해 숙주의 행동을 조종하는 이런 좀비 현상은 자연에서 많이 관찰된다. 다름 아닌 종족 번식을 위해서다. 다른 생물종을 철저히 이용해 끝내는 목숨까지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좀비로 이용되는 동물은 귀뚜라미·메뚜기·개미·바퀴(바퀴벌레)·거미·달팽이 등 다양하다.

영화 속의 연가시, 그리고 이와 다른 종류의 기생충인 모양선충은 육지 곤충인 귀뚜라미·메뚜기를 조종해 익사시킨다. 이는 이들 기생충의 특이한 생활사(Life-cycle) 때문이다. 연가시나 모양선충의 알은 물속에서 부화된다. 이후 물속에 함께 있던 모기 유충에 침투해 물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모기 몸속의 기생충이 번식하려면 다시 물속으로 돌아와 암수가 만나야 한다.

이를 위해 이들 기생충은 귀뚜라미를 좀비로 이용한다. 방법은 이렇다. 모기는 귀뚜라미가 곧잘 먹는 먹이 중 하나다. 연가시와 모양선충은 모기가 귀뚜라미에게 먹힐 때 함께 귀뚜라미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귀뚜라미의 시각(視覺) 체계를 혼란시킨다. 귀뚜라미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데, 밝은 곳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귀뚜라미가 활동하는 밤 시간대 숲속에선 대체로 물가가 훤하다. 귀뚜라미는 밝은 곳을 좇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연가시와 모양선충의 성충이 물로 돌아와 번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번식을 위해 개미를 조종하는 사례도 있다. 열대우림에 사는 곰팡이인 코르디셉스다. 이 곰팡이는 왕개미 머릿속에 들어가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면 개미는 한낮에 나무로 올라가 나뭇잎을 물고 매달리는데 이후로 꼼짝을 못하다 저녁 무렵 죽는다. 곰팡이는 밤사이 개미 머리를 뚫고 자라나 주변에 포자(胞子·생식세포)를 뿌린다. 포자는 나무 아래를 지나는 또 다른 개미들에 침투한다. 결국 곰팡이는 포자를 퍼뜨리기 가장 좋은 장소로 개미가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이다. 왜 개미는 나뭇잎을 문 뒤에 꼼짝 못하게 됐을까.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연구(2011년)에 따르면 곰팡이는 개미 근육에서 칼슘 성분을 모조리 빨아먹어 나뭇잎에 한번 매달린 개미가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좀비’ 현상들. 몸속에 알을 낳으려 바퀴를 끌고 가는 에메랄드바퀴벌레말벌(오른쪽).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등]

자연에서 관찰되는 ‘좀비’ 현상들. 몸속에 알을 낳으려 바퀴를 끌고 가는 에메랄드바퀴벌레말벌(오른쪽).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등]

말벌도 ‘좀비’를 이용한다. 에메랄드바퀴말벌이며, 좀비로 희생되는 것은 바퀴다. 말벌은 바퀴를 침으로 쏘고 날아간다. 바퀴가 꿈틀대다 잠잠해지면 다시 와 바퀴 식도의 신경 마디를 찔러 독소를 주입한다. 이어 바퀴의 더듬이 끝을 조금 잘라내고 체액을 빨아먹는다. 그런 다음 바퀴의 더듬이를 붙잡고 자기 둥지로 끌고 간다. 둥지 속에서 말벌은 바퀴의 다리에 알을 한 개 낳는다. 바퀴는 이 와중에도 5주 정도 살아 있다.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목숨만 유지한다. 말벌의 알은 애벌레로 부화해 바퀴의 몸을 먹어 치운다. 다 자란 말벌이 바퀴의 몸을 뚫고 나오면 좀비로서 바퀴의 역할은 끝이 난다.

말벌의 고치 보호용으로 희생된 무당벌레.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등]

말벌의 고치 보호용으로 희생된 무당벌레.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등]

말벌은 바퀴 대신 무당벌레를 좀비로 이용하기도 한다. 무당벌레를 공격해 몸속에 알을 낳는다. 알이 부화해 애벌레가 되면 무당벌레의 배를 뚫고 나와 무당벌레 다리 사이에 고치를 튼다. 이때까지도 무당벌레는 목숨을 부지한 채 고치를 틀 공간을 내주게 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나뭇가지에서 죽은 집시나방 애벌레.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등]

바이러스에 감염돼 나뭇가지에서 죽은 집시나방 애벌레.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등]

집시나방 애벌레는 바쿨료바이러스에 의해 좀비가 된다. 애벌레는 나무에서도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빛을 많이 받는 가지로 올라간다. 애벌레는 바이러스 숫자가 늘며 가지에 엉겨붙은 채 죽는다. 이후에 바이러스는 빗물과 함께 쏟아져 다른 애벌레를 감염시킨다.

감염으로 부어오른 달팽이 눈자루.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등]

감염으로 부어오른 달팽이 눈자루.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등]

달팽이도 기생충의 좀비가 된다. 달팽이는 새의 배설물을 먹는다. 이때 배설물 속에 기생충 알이 있으면 감염된다. 기생충의 유충은 달팽이의 눈이 달려 있는 눈자루로 이동한다. 기생충 때문에 달팽이의 눈자루는 퉁퉁 붓는다. 그럼 달팽이는 어두운 곳 대신 밝은 곳으로 올라가는 행동을 보인다. 퉁퉁한 달팽이의 눈자루는 새에겐 꿈틀대는 애벌레처럼 보인다. 새는 달팽이를 잡아먹고 기생충은 새의 내장으로 들어간다. 기생충은 거기에서 성숙해 알을 낳는다. 그리고 알은 또 새의 배설물로 섞여 세상으로 나온다.

개미 머리를 뚫고 자란 곰팡이.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등]

개미 머리를 뚫고 자란 곰팡이.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등]

생물학자들에게 이 같은 좀비 현상은 아직도 무궁무진한 연구 분야다.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는 “곰팡이·기생충·곤충 등이 숙주를 좀비로 이용하는 현상은 밝혀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용이 이뤄지는지가 규명되려면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S BOX] 고양이 몸속서 알 낳는 원충, 감염된 쥐 잡아먹히게 유도…포유류도 좀비로 이용

쥐와 같은 포유동물도 다른 생물에게 조종당하는 ‘좀비’가 된다. 기생충의 한 부류인 톡소플라스마 원충(사진)에 감염되는 경우다.

쥐는 원충에 감염되면 고양이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쫓아간다. 고양이 오줌 냄새를 맡은 쥐의 뇌는 성적 이끌림과 관련된 부위가 활성화된다. 고양이 오줌이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최음제로 작용하는 셈이다. 뇌의 신경전달물질로 행동 조절과 관련 있는 도파민 농도가 높아지는 것이 감염된 쥐의 뇌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날까. 톡소플라스마 원충의 번식을 위해서다. 이들 원충은 고양이 소화기관에서 암수가 만나 유성생식을 하고 알을 낳는다. 알은 배설물과 함께 고양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퍼진다. 실수로 고양이 배설물을 건드린 쥐는 알에 감염된다. ‘최음제’ 때문에 겁 없이 고양이를 쫓아가는 쥐는 고양이에게 잡아먹힌다. 원충은 이렇게 고양이 몸속으로 들어가 다시 번식을 진행한다.

문제는 사람도 톡소플라스마 원충에 감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에선 10~20%, 미국에선 22% 정도가 이 원충에 감염돼 있다. 이 원충 감염과 자살·조현병(정신분열증) 사이에 통계적 연관성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는 “미국·영국은 고기를 완전히 익혀 먹지 않는 식습관 때문에 감염률이 높은 편이다. 식습관이 다른 한국인에게선 감염률이 낮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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