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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광화문광장은 광장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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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연말의 광장은 다시 100만 인파로 가득 찼다. 10차례의 촛불시위에 연인원 1000만 명을 기록했지만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잘못 뽑은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민주와 희망을 불렀고 다음날의 광장은 놀랍게도 더 청결했다. 외신은 가장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형태라고 했으며 그렇게 광장은 시린 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로했다. 아마 오늘 저녁도 그럴 게다. 그런데 왜 광화문광장에서일까?

길이 도시의 핏줄이라면
광장은 정신이다
민주와 희망을 부르짖는
촛불집회는 혁명의 물결이다
광화문광장은 외딴섬이 아니라
선한 연대를 기억하는 장소여야

지금의 광화문광장은 사실은 광장이 아니다. 그냥 큰길이었던 이곳을 광장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직접적 계기는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이룬 축제적 풍경이었다. 그러나 2009년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광화문광장은 기형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차도를 건너야 접근할 수 있는 교통섬이었고, 시대착오적 크기의 동상과 집회를 방해하는 꽃밭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비일상적, 전시적, 봉건적, 반시민적이었다.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비아냥도 받았다.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익명성이다. 혈연으로 구성되어 인륜만으로도 운영되는 농촌과 달리 서로 모르는 이들이 모인 도시는 원활한 운영을 위해 법이 필요하며 그 법이 시각적으로 나타난 게 공공영역이다. 즉 길이나 공원, 광장 등인데 이들이 잘 조직된 곳이 선진도시요, 후진적이면 이들은 파편적이며 초라하다.

길이 도시의 핏줄이라면 광장은 정신이다. 광장이 시민의 시설로서 등장한 것은 그리스시대의 아고라부터인데, 항구 가까이에 화물과 상품의 시장터로 발생한 아고라는 정치를 논하는 시민들의 연설장으로도 쓰였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구매’와 ‘연설’이라는 단어는 아고라와 어원이 같다. 기능적 뜻의 아고라가 광장이라는 형태를 의미한 것은 고대로마의 ‘포럼’이었다. 로마인들은 잠잘 때 외에는 밀실의 반대말인 이 포럼에 모여 하루 종일을 보내며 자유인임을 확인했다. 그렇게 광장은 도시의 거실이 되었다.

2000여 년 전 유럽을 지배한 로마는 카스트라라는 군단캠프를 지배지에 먼저 설치하는데, 로마에서 오는 길에 직교하는 길을 만들고 그 교차점에 포럼을 두어 캠프의 중심공간으로 삼는다. 임시시설인 이 캠프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도시로 발전한 게 오늘날의 런던·파리·빈·프랑크푸르트 등이며 이들의 원도심인 시티지역, 시테섬, 그라벤광장, 뢰머광장들이 모두 로마군단의 포럼이었다. 이 이후 길과 광장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때마다 우선과제가 되었고, 광장의 위치나 형식, 그 주도권과 지위로 도시의 성격을 규정한 게 서양 도시의 역사가 된다.

  그러나 평지 위에 세워진 서양 도시들과는 달리 산밑 구릉지에 도읍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직선과 평면이라는 서양식 도시기법을 적용할 수 없다. 집들이 먼저 들어서고 그 사이의 공간이 공공영역이 되었다. 지형을 따라 곧게 가다가도 휘어지고 넓다가도 좁아졌으며, 필요에 따라 길로도 광장으로도 쓰였다. 그래서 서양 광장의 기하학적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유동적인 풍경의 길놀이가 발달한다.

서울도 마찬가지였지만, 정도전이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축 위에 경복궁을 배치하고 광화문 앞을 비워 양옆에 육조를 설치하면서 육조거리라는 광장 같은 길이 나타났다. 서울의 유일한 도시축인 이곳은 600년 조선왕조의 상징이며 그 자체로 역사여서 광화문광장에 서 있다는 것은 늘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말과 같다. 게다가 이 기다란 공간은 방향성이 있어 경복궁 너머 북악의 기슭 청와대로 향한다. 높은 곳과 낮은 곳, 밀실과 광장, 전제와 민주…. 소위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이렇게 극적으로 대치하는 장소를 다른 도시에서는 찾기 힘들다. 늘 긴장이 팽배해 혁명의 기운이 움트는 곳, 그래서 여기로 모이는 게다.

그랬다. 길놀이 같은 행진의 풍경, 두 달이 넘게 지속된 광장의 촛불풍경은 혁명의 물결이었다. 해나 아렌트는 혁명을 이끄는 동기는 도덕이라고 했다. 수백만 명이 모였지만 어느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고 희망을 외친 까닭이 우리의 도덕적 우위를 믿었기 때문이다. 광장에 나가 있는 동안 문장 하나가 줄곧 떠올랐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흐르는 존엄성”. 유엔인권선언 서문의 한 구절이다.

새해 첫날 아침 다시 광장을 찾았다. 지난밤의 축제는 말끔히 정돈되어 예전의 풍경을 회복했다. 그런데 이 파편적 모습의 광장이 민주와 희망을 부르짖은 장소라는 게 아이러니였다. 여기서 우리가 부르짖은 공의, 도덕과 상식이 새해에는 반드시 실현되겠지만 이 장소도 거듭나야 마땅하다. 멀리 떨어진 외딴섬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와 우리의 선한 연대를 기억하는 장소, 그게 광장의 진정성을 찾는 일이며 우리 내면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일일 게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