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우리에겐 피곤한 디폴트가 주어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부 차장

김승현
사회2부 차장

“촌놈이 이만하면 출세했지. 내 ‘디폴트’를 생각하면 더 욕심낼 게 없어요.”

지난해 4월 총선 출마를 앞두고 K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개똥철학이라며 ‘디폴트(default)론’을 펼쳤다. 디폴트는 컴퓨터 용어로는 ‘기본설정 또는 초깃값’을 말한다. 대략 ‘아무것도 안 건드린 새 컴퓨터나 소프트웨어’로 이해하면 된다. 사람으로 치면 신생아다.

K가 설정한 디폴트는 ‘깡촌에서 태어난 가난한 촌놈’이다. “내 디폴트를 생각하면 선거에 떨어져도 아쉬울 게 없다”고 했다. 50여 년간 K에겐 명문대 법대 졸업, 고시 패스 등의 스펙이 쌓였다. 지금은 초선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이 추가됐다. K는 “새로운 상황에 진입할 때 항상 디폴트를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욕심이 없어지니까”라고 말했다. 그가 개똥철학대로 사심 없이 본질을 추구하는 국회의원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K의 진정성은 검증할 수 없지만 디폴트론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의 여러 일상에 적용해 봤다. 실패 끝에 대학에 합격하고 세상을 얻은 듯했던 순간, 언론고시라는 바늘구멍을 뚫고 가슴 뿌듯했던 장면이 스쳐 갔다. 지금은 당연하게 때론 허접하게 여겨지는 간판들이다. ‘나의 역사 중 어느 시점을 디폴트로 잡아야 하는가’도 헷갈렸다.

고민은 이 나라 대한민국의 디폴트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헌법 1조를 다시 읽어봤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국가의 헌법 1조는 명실상부한 디폴트다. 하지만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사태로 대통령이 만신창이가 되는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의 디폴트는 진화한 것 같다.

우리의 디폴트는 법전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연말연시의 토요일에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200만 헌법수호대’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깨끗하고 평화로웠다. 유사 이래 이런 시민을 가진 나라가 있었을까. 이 나라의 시민들은 과도하리만큼 민주공화국적이고, 국민주권주의적이었다. ‘지극히 합헌적으로’ 행동하는 한국 시민의 디폴트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어떤 결론으로 마무리되더라도 이 디폴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앞으로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앞서의 디폴트론을 따를 수 있는가이다. 촛불집회를 디폴트로 가진 시민들의 삶과 그들이 사는 시스템은 많이 바뀔 것이다. 200만 명이 모이고도 깨끗했던 그 광장에 담배꽁초를 버리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광장에 쓰러진 노숙자를 예전처럼 그냥 지나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무척이나 피곤한 디폴트가 주어졌지만 그 주인의 한 사람이란 게 자랑스러운 새해다.

김승현 사회2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