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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눈치 보다 통화관리 골든타임 놓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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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호 18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장편소설 『양철북(1959년)』은 나치 정권의 광기를 가능하게 했던 독일인들의 정치의식을 자성하는 작품이다. 20세기 전반 독일 사회의 기형적 모습이 주인공 오스카를 통해 전개되는데, 양철북을 두드리는 그는 정상이 아니다. 태어나면서 이미 성인의 지성을 가졌으나 몸은 난쟁이다. 어느 순간 성장이 멈췄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모습은 오스카와 정반대다. 외형으로는 G20 회원국이 될 정도로 건장한 체구를 가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성장을 멈추다 못해서 가히 혼수상태다. 얼마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내의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에” 2017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하향 조정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일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있었다. 정부가 서울을 버리고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심각한 정치적 충돌이 빚어졌다. 그 시작은 1952년 1월 직선제 개헌안 부결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의식하고 한 달 전 자유당을 창당했지만, 그 안에서 인기는 없었다. 대다수 의원들이 개헌안을 거부하고 차라리 장면 총리를 앞세워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려고 했다.


당황한 대통령은 1952년 4월 20일 총리를 장택상으로 대체하여 ‘반이(反李)’파를 압박하는 한편, 5월 25일에는 공비소탕을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고 언론검열을 시작했다. 같은 날 국회의원 출근버스를 덮쳐 그 안에 탄 내각책임제 지지 의원들을 구금했다. 국제공산당 자금이 정치권에 유입되었다는 이유였다. 참다 못한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독재 호헌운동’을 선포하려고 하자 괴한들이 난입해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발췌개헌안이 통과(7월 7일)되고 새 헌법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이런 친위 쿠데타를 ‘부산정치파동’이라고 한다.

[유엔군 체류비용 해결 방안 시급해져]
부산정치파동 전에는 안정을 목표로 경제정책들이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 정부는 1951년 들어 조세특별법(1월) 제정과 함께 누진과세 개념을 도입했다. 아울러 조세임시증징법(3월)·재정법(9월)·임시토지수득세법(9월)·관세법(12월) 등을 통해 세수기반을 착실히 넓혔다. 조세범처벌법(5월)은 납세풍토를 바꿔 놨다. 덕분에 1951년은 전쟁 중인데도 재정수지가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퇴치에 주력했다. 금융기관별로 대출한도를 설정(1951년 1월)하거나, 거액 대출은 사전에 일일이 심사(2월)하거나, 예금에 대해서 지급준비금을 예치(4월)토록 하는 방법들을 동원해서 돈줄을 바짝 조였다. 아주 원시적이지만, 나름대로 ‘통화량’이라는 개념을 잡고 통계를 편제하기 시작했다(오늘날 IMF 통계작성기준과는 많이 다르다).


그 무렵 물가안정의 가장 큰 위협요소는 유엔군에 대한 한국은행의 대출금(유엔군 대상금)이었다. 당시 유엔군의 체류비용을 한국은행이 대출했는데, 그 규모가 계속 늘어나는데다가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환율이었다. 미화 1달러 당 1800원이었던 환율이 6000원까지 치솟아 어떤 환율을 적용할지가 난감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외화표시 채권 발행이었다. 한국은행이 대출할 때는 화폐 대신 ‘외화표시 통화안정증권(통안증권)’을 발행하고, 유엔군은 그것을 팔아서 경비를 쓴 뒤 훗날 통안증권의 원리금만큼을 달러화로 갚도록 하는 것이다. 당장의 통화팽창과 훗날의 환율적용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문제는 법률이었다. 한국은행법(제7조)은 금융통화위원회가 한국은행의 외국환업무를 관장토록 했지만, 외국환관리규정(대통령령 제324호 제4조)은 외환정책과 절차를 정부의 권한으로 규정했다. 그때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는 국회가 만든 한은법보다 대통령이 만든 규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 무렵 대통령에게 완전히 찍혔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에 대한 관할권 문제가 한·미 양국의 중요한 현안으로 제기됐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단 미국이 수복지구를 관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먼스키 육군대령을 평양 군정관 겸 평안남도 민정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도 당연히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헌병 부사령관 김종원 대령을 같은 자리에 앉혔다. 양국 정부를 대신하는 두 사람은 당연히 충돌했고, 1·4후퇴를 시작할 때는 각자 출발할 정도로 알력이 컸다.

[구용서 총재, 철저한 몸 낮추기로 일관]
이때 미군은 급하게 철수하면서 2만 여 달러의 군표를 분실했다. 지난호에서 다뤘듯이 얼마 뒤 암시장에 나온 이 군표를 한국은행이 사들여 신권 운송비로 노스웨스트항공사에 지급하려다 적발됐다. 약점을 잡은 맥아더 사령부는 군표 밀반출을 엄중히 항의했고, 대통령은 사과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김준연 법무장관과 백두진 재무장관이 극구 만류하여 형사책임은 겨우 면했지만, 구용서 총재는 완전히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그 무렵 대통령을 화나게 하는 일이 또 있었다. 미국에서는 1951년 5월 상원 군사·외교합동위원회의 ‘맥아더 청문회’를 고비로 전쟁 피로감이 확산됐다. 국무부의 온건파들이 모스크바에 휴전을 타진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면 타협하지 않겠다며 휴전을 맹렬히 반대했다. 미국은 그런 이승만을 완전 무시하기로 했다. 남한은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했기 때문에 어차피 휴전협상의 당사자도 아니지 않은가. 1951년 6월 말 리지웨이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이 중국 측과의 휴전협상 시작을 알려왔다. 대통령은 다른 방법이 없어 휴전반대 관제데모로 분을 풀어야 했다.


대통령이 이렇게 심기가 편치 않을 때 외화표시 통안증권을 발행하면, 몇 달 전의 군표사건을 연상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구용서 총재는 양철북을 두드리는 오스카처럼 철저히 무기력하고 왜소해지기로 작정했다. 한은법만으로는 한국은행이 외화표시 통안증권을 발행할 수 없다면서 “정부가 나서 달라”는 요청서를 재무부로 보냈다. 요청서를 보낼 때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까지 거치는 조심성을 보였다.


요청을 받은 재무부는 ‘통화안정증권발행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별 내용도 없던 그 법안은 국회에서 핵심쟁점으로 떠올랐다. 법안을 접수한 의원들은 “외환에 관한 사항을 왜 대통령령으로 규제하고 있는가”라며 그 법 대신 외국환관리법부터 만들 것을 요구했다. 외환규제의 출발점을 대통령이 아닌 국회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인 한국은행과 재무부는 1953년 1월 ‘외국환관리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다. 그 사이에 환율과 물가는 계속 올랐다. 그러면서 골든타임이 흘러갔다. 부산정치파동의 후유증으로 많은 경제 법안들이 동력을 잃는 바람에 그 법은 9년 뒤 제2공화국에 이르러서야 제정됐다(1962년 1월). 의원들이 먼저 요구했던 외국환관리법이 훗날 비리 의원을 잡아들이는 올무가 된 것은 아이러니였다.

[98년 외환위기 맞고서야 외화표시채 발행]
이후 한국은행은 외화표시채권 발행의 꿈을 접었다. 한국은행이 과도한 환율하락 방지를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한 뒤에는 국내 금융시장에서 원화표시 채권을 발행해 풀린 돈을 흡수한다(필리핀도 이렇게 한다). 처음부터 외환시장에서 외화표시 채권을 발행(스위스가 이렇게 한다)해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보다는 확실히 번거롭다. 한국은행이 2단계 방식을 취하는 것은 “한은법으로는 외화표시 통안증권을 발행할 수 없다”는 구용서의 눈치보기가 남긴 유산이다. 이처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상황을 경제학자들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고 부른다.


위기를 맞았을 때 정부의 대응은 한은과는 달랐다. 1998년 4월 정부는 바닥난 외환보유액을 채우기 위해서 외화표시 국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 40억 달러)를 발행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요, 한국은행은 생각지도 못한 파격이었다. 그때 국민들은 외환위기 탈출을 위해 경로의존성의 사슬을 끊은 재정경제부에 환호했다.


한편, 외화표시 통안증권 발행이나 환율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1억 달러가 넘는 유엔군 대상금을 하루 빨리 받아내는 것이었다. ‘빈집에 소 들어오는’ 경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똘똘 뭉쳤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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